“우리의 목적은 텍스트의 복수성을, 그 의미현상의 열림을 생각하고 상상하고 체험하는 데 있다.” - Roland Barthes

바르트의 텍스트 분석

바르트에게 있어 의미작용은 소쉬르의 기호학적인 개념으로 닫혀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구성된다. 그런데, 소쉬르는 언어에 대해 구조주의적인 사유를 하고 있었기에 그 의미작용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기호 안의 기의가 확정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일한 기의라고 해도 분명 사람마다 기호에 대해 갖게 되는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바르트는 의미와 구별되는 ‘가치’의 개념을 사용한다. ‘가치’의 개념은 의미를 기표와 연결된 기의로 보는 의미작용이 차이점을 드러내지 못하는 난점을 해결해준다. ‘가치’의 개념에서는 의미를 하나의 ‘즉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면서도 무한한 조합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이 ‘가치’의 개념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현상의 ‘열림’과 ‘복수성’을 상상하고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텍스트 분석은 이제 어떤 방식으로 구조가 잡혀있느냐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구조를 만들어내느냐를 관찰한다. 그렇다고 바르트가 구조분석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고정된 의미가 있는 대상은 ‘구조’를 관찰하여 그 의미작용의 체계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구조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바르트는 텍스트 분석을 통해 의미작용(signification)이 아닌 구축과 결합을 통해서 새롭게 의미가 생산되는 것을 관찰하고자 한 것이다. 바르트는 이를 의미현상(signifiance)이라 명명한다. 즉, 텍스트 안의 모든 것은 무엇인가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 의미의 합이 보다 궁극적인 구조나 더 큰 의미를 대변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합성의 오류’가 되고 만다. 결국, 텍스트는 열려 있고 그 조합은 무한하며 새로운 의미 생산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의 열림과 새로운 의미생성에 대한 전형적인 예로 윤동주의 시 ‘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우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야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위 시에는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별주부전의 내용과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내용이 혼합되어 있다. 시인은 시적 자아의 고귀한 품성이나 양심을 ‘간’으로 은유하면서 두 설화의 텍스트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내고 있는데, ‘토끼’의 경우 욕심이 많으면서도 잔꾀와 기지가 살아있는 원래 ‘별주부전’의 캐릭터에서 벗어나 습해지기 쉬운 ‘간’을 양지바른 곳에 말리면서 또한 소중히 다루는 모습을 나타내면서 프로메테우스와 중첩되어 시적 자아를 형상화하고 있다. 윤동주는 이 시에서 이미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의 열림과 그 복수성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의 죽음

바르트는 기표로서의 텍스트가 만드는 의미의 다양함을 드러내기 위해 이야기의 단위로 렉시(lexies)를 사용한다. 이는 체계적인 단위가 아니라 바르트가 임의로 사용한 읽기단위이다. 발자크의 단편소설 Sarrasine를 분석한 ‘S/Z'에서 바르트는 3개의 렉시에서 5개의 코드를 발견하고 그 코드들에 의한 느린 독서를 시행한다. 여기서의 코드는 텍스트를 읽는 하나의 프레임이자 그것을 사로잡는 그물인데, 코드가 5개로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바르트는 신약성경의 사도행전 10:1~3을 12개의 코드로 나누기도 한다.

바르트는 이런 방식으로 의미가 생성될 수 있는 모든 기표로부터 코드를 꺼내고자 한다. 이렇게 하여 개개의 렉시들은 텍스트가 전개되어 감에 따라 코드에 의해 서로 섞이고 겹쳐진다. 바르트에 의하면 각각의 코드는 텍스트에 담겨 있는 하나의 목소리에 불과한 반면, 텍스트는 단 하나의 목소리가 아닌 여러 소리가 합쳐진 ‘네트워크’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 주장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상호텍스트’라는 개념에서 비롯된 것인데, 하나의 텍스트는 항상 또다른 텍스트와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바르트 자신도 이미 1968년 후기 구조주의자로서 이론을 폈던 최초의 논문 ‘저자의 죽음’에서 비슷한 주장을 편 적이 있다. 이는 한 마디로 저자가 텍스트의 기원이라는 설을 부인한다. 텍스트는 항상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이전의 텍스트를 반영한 것이고 때로는 파생적 아이디어, 변종, 표절과 패러디를 통해 존재하는 것이지, 더 이상 작가의 오리지널한 저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작가는 코드를 발송하는 사람의 위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예는 무수히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사회계약론’에서 장 자크 루소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군주주권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밀하게 공화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는데, 이런 해석은 마키아벨리의 ‘로마사논고’의 텍스트와 비교하면서 얻어진 결론이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프로이트는 인간의 금기된 성적 욕망의 표현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똑같은 텍스트에서 르네 지라르는 다른 신화와의 비교를 통해 모든 신화에 내재된 희생양 제의를 발견, 무고한 1인에 대한 만인의 집단적 폭력을 통해 사회가 질서를 회복한다는 논의를 전개하면서 신화는 그 무고한 1인이 희생될만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렇듯, 하나의 텍스트는 다양한 코드를 통해서 또 다른 텍스트와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새로운 의미를 구축하고 생성하게 되고 독자 또는 수용자는 이제 텍스트를 능동적으로 독해하며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자기의 처지와 구미에 맞게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게 된다.

텍스트와 쾌락, 이데올로기에서 무의미로

이후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쾌락(pleasure)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 하나는 황홀경이나 희열(jouissance)로서 굳이 성적으로 표현하면 오르가즘과 비슷한 개념이다. 다른 하나는 희열보다 다소 약한 개념으로 평범한 ‘재미’(fun)를 말한다. 이 두 가지의 차이는 텍스트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바르트는 텍스트를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writerly text)와 읽혀질 수 있는 텍스트(readerly text) 두 가지로 구분한다.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는 독자가 자신의 입장에 맞게 해석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끔 열려 있는 텍스트를 의미한다. 영화로 예를 들자면 미장센을 중시하면서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롱테이크로 화면을 처리하는 약간 지루하고 느린 영화가 있다. 이런 영화는 관객이 자율적으로 화면 어딘가를 응시할 수 있으며 화면에 담겨진 주변적인 풍경과 소품들을 음미할 수 있게 된다. 주로 유럽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고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도 그런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한편, 읽혀질 수 있는 텍스트는 독자가 한 가지 지배적인 의미로만 읽기를 강요당하는 닫혀 있는 텍스트이다. 화면전환이 빠르고 카메라가 자주 움직이는 그런 영화들, 대표적으로 헐리웃 액션영화가 이런 문법을 따르고 있는데, 이런 영화들은 관객이 말 그대로 카메라의 흐름을 따라서 다시 말하면 감독이 인도하는 그대로 시선을 옮기면서 수동적으로 재미를 느끼게 된다.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 등의 문학에서도 이런 작품들이 등장한다.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로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이나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의 부조리극,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회화 등을 추가로 예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바르트에 의하면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가 희열을 준다면 읽혀질 수 있는 텍스트는 평범한 재미를 주는 것에 그치고 만다. 당연히 바르트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이며, 어떤 텍스트든지 궁극적으로는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는 대부분 지루하고 난해하며 때로는 무의미에 가깝다. 결국 바르트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의미이다. 읽혀질 수 있는 텍스트도 메타적으로 읽히면 그 신화의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게 되는데, 다시 그것은 궁극적으로 무의미로 회귀한다. 다시 말하면 무의미란 단순히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마저 근본적으로 의미를 박탈당하고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바르트는 이를 통해 신화론의 ‘이데올로기’에서 ‘무의미’로 한 발 더 나아간 셈이다.

그렇다면, 왜 무의미인가? 바르트는 세상의 모든 의미들은 인간을 억압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텍스트에서 의미를 박탈하여 억압의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쾌락적 유희에 이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는 68혁명으로부터 온 환멸감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를 뒤흔들었던 68혁명은 다양한 의제들을 분출시켰지만 수렴되지 않는, 즉 발산해버리는 반항의 에너지는 결국 혼란과 무기력으로 빠져들고 만 것이다. 여기서 오는 환멸감으로 인해 거대 정치담론마저 결국 하나의 신화로, 이데올로기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사회의 신념체계를 떠받드는 언어의 구조를 불신하면서 그 모든 텍스트에서 의미를 박탈하고자 했던 것이다.

바르트의 한계와 의의

바르트가 후기 텍스트 분석을 통해 무의미로 나아간 것은 왠지 필연적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초기에 바르트는 ‘신화론’에서 이미지의 기표와 기의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 2차적인 기의를 찾고 그것이 어떻게 신화로 기능한지를 분석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바르트 스스로도 인정하다시피, 신화를 파헤친 그 신화분석가의 견해마저도 또 하나의 신화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신화의 이데올로기를 밝혀내는 작업마저 다시 신화가 되어버리는 것, 그것이 첫 번째 한계이다. 따라서 바르트가 결국 그 신화의 이데올로기에서 텍스트의 무의미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바르트의 ‘무의미’는 사회학적으로 적용할 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이런 무의미는 궁극적으로 포스트모던의 특징이다. 의미의 박탈, 개인의 해방이 과연 무엇을 담보하는가, 다시 상투적인 비판으로 돌아오면 결국 대안은 없게 된다. 바르트를 넘어 포스트모던 일반으로 넘어가게 되면 이들의 논의는 거칠게 말해 ‘머리가 아프니까 목을 자르자’는 식의 이야기로 들린다. 텍스트에서 의미를 박탈하여 모든 거대 담론들을 불신하고 부정하는 행위가 왠지 성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이성과 교제하다가 몇 번의 실패와 상처를 거듭했다고 모든 이성을 불신하며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는 사람처럼 약간 애처롭다. 기득권에 대한 대항담론이 문제를 드러내면 다시 변증법적으로 발전된 새로운 담론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닫혀진 텍스트를 유연하게 열린 텍스트의 성질로 바꾸면서 교조성을 지양하면서 보다 민주적인 담론으로 새롭게 의미를 생산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기에 차라리 하버마스가 민주적 의사소통의 공론장을 만들자는 대안이 차라리 보다 더 설득적으로 들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바르트의 의의는 있다. 그는 소쉬르의 기호학적 방법론으로 ‘언어’를 넘어 잡지의 이미지, 패션잡지의 모드, 문학작품과 텍스트 등 기호연구의 범위를 확장하여 탐구하였다. 또한 그는 사회를 해석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가들의 이론을 접목시켜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키고 대중이 읽기 쉽게 글을 썼던 몇 안 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모든 언어와 이미지와 이야기들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움이 궁극적으로 신화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무엇이든 보이는 그대로 믿지 말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즉, 바르트는 새로운 인식론의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신화적 자연스러움을 폭로하고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바르트는 자신의 분석마저 하나의 신화이자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결국 수용자 개개인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독해가 중요함을 역설하였던 인식론의 민주주의를 개척한 사람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방향이 결국 허무주의와 도착적 쾌락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이 한계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recuperate/70019473811

by 호연lius 2007. 10. 30. 1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