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에 찌든 나에게 어머니께서 문자로 보내 주신 글쓸 기회

책을 볼 수 있건 없건, 글을 쓸 수 있건 없건 간에 이런 것에서 애정을 느끼고 그래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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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연lius 2017.04.18 10:15
-------딴지 투고글---------

처음에는 딴지의 기사 아래에는 댓글을 달 생각이 없었소. 싸움을 끝내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침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딴지가 원하기에 그리고 사람 돕는 일이라곤 꼴랑 정기 후원밖에 없던 나를 반성하며 리뷰를 청했다오. 원래는 딴지가
원하는 반팍이나 비판보다는 나의 앙 간증을 써 나갈까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마음에 답해주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여
짧게나마 그런 것들도 써볼까하오.

우선 저자의 머릿말, 니체가 외쳤던 것처럼 인간의 해방과 행복을 바라는 저자의 마음에 경의를 표한다오. 과학적 논리적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찾아가는 방법으로서 책을 저술한 숭고함에 감사드리오. 그런만큼 대상 독자는 명확하게
한정되어있소. 기독교 앙때문에 고통받는 기독교인. 그것은 이 책의 장점이지만 또한 한계이기도 하오. 그리고 나는 반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오. 기독교 앙덕분에 행복한 기독교인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중요 단락을 반박할까하오. 그러나 성경무오설에 기반한 비판은 언급하지 않겠소. 솔까말 장로회 고 목사인 우리교회
목사님도 '성경 안의 진리가 오류가 없다는 것'이라고 애둘러 말할 정도로 고대의 유물이니까. 내가 복음서를 필사한 적이 있는데
그 필사본도 분명한 성경이지만 그 짧은 분량에도 상당한 오탈자가 생기더이다. 인간이 하는 일이 무오할 턱이 있나.

나는 교리를 전제, 핵심, 적용으로 나누어서 본다오. (아, 내 소개를 하자면 서른살의 평도이고 아버지는 나일롱 도,
어머니는 범론자인 환경에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다가 잠시 발길도 끊었다가 몇년전 그리스도를 내 삶의 길로 정했다오.)
대표적인 전제로 주님께서 기쁘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고 또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것이라오. 저자는 인간이 의 기쁨조가 되는
교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고 자유의지 또한 궤변으로 여기고 있지만 내 생각은 전혀 다르오. 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긴 어렵지만
가장 흔한 비유로 부모와 자식을 들 수 있소.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왜 낳았겠소? 남들 다 하니까? 실수로?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는 기쁘기 때문일 것이오. 나 역시 아이가 웃고 떠들고 자라나는 것을 보며 기뻐하고 싶어서 아이를 낳아 기를 것이오.
이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이오? 자유의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오. 내 맘대로 낳은 아이지만 모든 것을 내가 원하는대로 판검사
만들어서 부잣집 며느리 얻으려고 한다면 그야말로 잘못된 것이겠지. 아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사랑임을
모두가 알 것이라고 생각하오. 체벌이나 비행같은 교육적인 문제는 접어두시오. 이건 아무래도 비유니까.

이 인간을 장기판의 졸로 여겨서 기분나쁘다는 비유는 회사 조직의 비유를 하고 싶소. 회사에서는 목적에 맞게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또 우리도 거기에 따라 배치되어 일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 생각하오.

을 위해 인간이 희생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인간을 위해 이 희생하는 것은 정당한지 묻고 싶소.
인간을 위해 인간이 희생하는 것은 정당한지도. 혹시 희생이라는 것 자체가 악덕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소만 나는 자기 희생이야
말로 사랑을 입에 담기위해 필수불가결한 미덕이라고 생각하오. 강요에 의한 희생이 아니라 사랑하니까 자발적으로 희생하는거요.
사랑을 해본 사람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거요.

회개와 천국 기준의 불합리성에 대해 저자는 이야기 하고 있소. 착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여길 수도 있을테지만 (진짜 착하다면
많은 사람이 구원받는데 싫다고 하진 않겠지만) 난 보통사람, 정확히 말해서 악한 사람으로서 저 기준에 무한히 감사하고 또
그래서 이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오. 법률상 죄는 지어본 적이 없지만 스스로 생각하기 많은 나쁜 짓들에도 불구하고
이 나를 대해 죗값을 받았기에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은 무한히 감사드릴뿐이오. 살인마들이 구원 받는다고 내가
사기라고 외칠 이유가 있겠소? 도둑질은 되도 살인은 안된다거나 강간은 안되도 거짓말은 된다거나 그런 기준이 어디있고 누가
정한단 말이오. 원수라면 내 집에 들어오기만 해도 주거침입이겠지만 사랑하는 자식이라면 돈을 훔쳐 달아나도 용서하지 않겠소.

앙인을 조롱하기 위해 파스타파리안이 등장했지만 이를 그리스도인과 비교하는 것은 무척 불쾌하오. 그 날아다니는 파스타가 인간을
위해 자기 살을 때 내어 파스타 한접시를 대접했다면 모를까 예수와 비교하는 것은 논리적 반격이 아니라 조롱하고 경멸하기 위한
천박한 농담에 불과하오. 파스타에게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대로 살려고 애쓰면서 파스타에게 기도한다면 그것은 지금의
파스타리안과는 다른 앙인이 되겠지만 말이오.

사라 바트만의 삶에서 공의를 물을 필요가 있었를까 싶소. 인간의 악함이 사라 바트만을 비참하게 만든 것이기 때문이오. 돈에
대한 탐욕이 그녀를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든것이오. 인간은 그런 존재요. 동생을 자꾸 주먹으로 때리는 꼬마에게 부모가 동생을
때리지 말라고 말하면 동생을 발로 차면서 때린게 아니라 발로 찬거라고 우기는게 인간이거든.

책의 많은 부분에서 저자는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이 왜 그랬을지 묻고 있소. 답하지 못하기에 은 없다고 말하오.
그런데 내가 납득하지 못한다고 그것이 없는 것이 되겠소? 내가 3차 방정식을 풀지 못한다고 거기에 답이 없는 것인 아닌데
말이오. 하물며 인간과 의 간극이란 말로 설명하는게 애처로운 일 아니겠소.

나는 저자의 책이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에서나 나왔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지금 한국에서 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 있는지
의문이란 말이오. 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 때문에 기독교인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소. 목사들도 이권추구, 도들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전력 질주하는 이 한국 교회에 어디서 죄책감과 두려움을 찾아볼 수 있단말인지...그런 점에서 그런 고뇌를
가졌던 저자에게 일말의 존경심마저 생길 정도라오. 내가 아는 것은 교회 시스템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많은 평도들을 사역에
끌어들이고 죄책감으로 옭가매어서 사역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짜증나는 행태뿐이요. 나 같이 직분도 직책도 없는 사람이라면
느낄 기회조차 없고 사역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역을 놓고 자유와 해방을 맛본 많은 열심 자들이 있소. 그런 차원에서라면
을 벗어버릴 이유가 없는 것이오. 벗을 것은 인간의 시스템뿐.

오히려 나는 이 시대에 그대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권하오. 세상은 돈과 성공에 미쳐돌아가고 나아갈 기미도 보이지 않고
답답하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한 현대 한국 사회에서 나의 주님은 나에게 안식처이고 사랑이고 희망이라오. 병중에 고통과 외로움과
싸울 때 내게 위로가 되어 포기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게 해주셨소. 많이 못 배우고 많이 못 벌어서 사회적인 멸시를 당할
때에도 인간의 가치는 그가 배운 지식과 그가 지닌 재산에 있지 않고 믿음과 사랑에 있음을 들어 나를 존귀하게 여겨주셨소.

나는 내 자식에게 내가 받은 이 사랑을 물려주고 싶소. 험한 세상에 따뜻한 을 껴입혀 내보내고 싶소. 실패하고 실패해도
사랑은 변치 않음을 말해 주고 싶소. 인간이 악하고 약해서 이 아비조차 너를 사랑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으니 너는 늘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알려주고 싶소.

옷을 벗을지 입을지는 환경에 따라 다른 것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저자와 딴지에 감사를 전하며 마치오.

평안하시길.

----------------------------------아래는 윗글에 대한 댓글에 대한 답글 ----------------------


책이나 한국 개교가 아닌 나의 기독교 리뷰 - 나사로

졸필을 기사화 해준 딴지와 읽어준 흉들에게 감사하오. 많은 댓글들에 적잖게 놀랬고 졸필이라 창피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두드리는 것은 이것이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는 딴지 잉여층의 선행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오. 이렇게 예의 바른 사람이야 내가.

지난 번 글은  벗어 던지기 책에서 저자의 이야기에 화답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번 글은 지난 번 글에 대한 댓글에 화답하기
위해서 없는 시간에 짧게나마 적어보려고 하오. 딴지 회원이 아니라서 일면의 댓글밖에 못 보기에 전부 답할 수 없음을
알아주시오. 논리적 반론이 아니라 내 앙을 말하는 글이니 필터링해서 읽어주시길 부탁하오.

먼저 두 그리스도인의 질문에 간단히 답하겠소.

직분도 직책도 사역도 없이 미안하지 않냐는 근엄한 훈계는 감사히 받아드리오만 그 사실이 주님께 죄송한 것은 아니오. 다만 그
사람들의 노력에 내가 혜택을 보는 것을 알기에 그들에게 밥이라도 한번 더 대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며 도와주려고 노력하고
있소. 그대가 악의로 정죄하지 않고 선의로 조언해준 것에도 감사를 표하오.

그리스도인과 가난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러하오. 가난한 사람은 주님 외에 기댈 곳이 없소.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같이 주님을
사랑한다면 부자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만큼 주님을 사랑한다면 소득이 많을 지언정 자산이 많을 수가 없을
것이오. 전부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자도 그 정도만 가지고 살 테니까. 더 높은 소득을 바라는 것은 좋소. 그리고 기부를
통한 자발적 가난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부자가 그렇게 사는 것은 이건희가 자과 자녀들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오. 나는 헌금과 기부금의 비율을 비슷하게 쓰면서 전세금과 중고차 살 돈을 모으고 있는 노동자요.

이제 다른 답에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해 나의 성장 코스를 설명하겠소. 워낙 단답형 토막글이 되어 생략된 부분은 여기서 추론해서
찾으시면 편할 것이오.

론->논리->불가지론 -> 체험 -> 유론 -> 탐색 -> 예수

인간이 완벽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한다면 그 시작은 불가지론일 것이오. 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이나 빅뱅이전의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하오. 지금 세상의 기원을 이라고 생각하건 우연이라고 생각하건 논리는
동일하오. 다만 과학적으로 사고해볼 때 우연이라는 대답은 과학적 사고를 포기하는 것이므로 이라는 미지수를 선택하는 것이오.
이 바탕으로 모든 댓글에 답을 하겠소.

포멧님의 성의 있는 댓글에 감사 드리오. ' 인간은 죄인이며, 교회는 죄인들의 모임' 이라는 말로 대하오.
samdor 님의 물음에 답하겠소. 답은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이오.

살면서 사람들은 몇번즘은 기적을 경험하기 마련이오. 혹자에게는 그저 우연이 자꾸 일어나는 것뿐이겠지만 나에게 그 우연의 중첩은
주님의 증거가 되오. 나는 내 기적을 보았고 그래서 믿음을 가지오.

예수의 죽음이 어째서 인류의 죄와 상관이 있는지에 대해 답하오. 인간은 죄를 지니고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없소. 그래서
의 죄를 동물에게 씌우고 제사를 드려 자의 죄를 씻는 것이 유대의 전통이오. 죄의 값은 죽음이기 때문이지. 전 인류의
죄는 너무 많고 크고 깊어서 동물 제사로는 땜질 처방 밖에 안되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 값을 매꾸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으셨소. 이 사랑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라오.

나의 행복의 근원은 부모와 친구 같은 환경 때문이라는 말에 답하겠소. 나보다 더 좋은 환경을 가지고 불행한 사람을 수도 없이
알고 있고 나 역시 불행하다 여겼던 적도 있소. 나는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감사하지만 그런 조건이 당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소. 또한 예수를 믿는다고 복 받아 행복할 거라는 것은 희망 사항에 불과하오. 정말로 그 길을 따르는
것은 외롭고 힘든 길이오. 나 역시 그런 삶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옳은 길에 대한 믿음과 천국 소망이 있기에 걸어보고자 하는
것이오.

전도 방식에 대한 많은 항의는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부끄럽게 생각하오. 이것은 인간의 예의의 문제인데 지금은 폭력적이라고 말할
지경이 되었소. 무례한 기독교인을 대해서 사과하오. 다만 나는 그 안에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오. 블루칼라 어른이 사랑으로
다들 행복 하라는 마음에서 글을 쓴 것처럼 말이오. 아, 물론 표현은 바로해야하오.

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기쁨이라면 무엇을 믿어도 상관없지 않냐는 말씀이 계셨소. 자의 마음에 평안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하여도 좋겠지요. 다만 좀 더 좋은 세상과 진리를 찾고자 한다면 예수라는 사내의 삶이 멋있음 인정할 것이오. 그리고 그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면 그가 말한 하느님이 그리고 그분께서 태초부터 영원까지 계 주님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이오.

이 있다면 세상에 왜 악이 많고 이렇게 불행한가에 대해 답하겠소. 세상에 악이 없고 모두 행복하다면 누가 하느님을 찾을 것
같소? 아무도 없을 것이오. 심지어 구약에서는 하느님께서 살아 계 증거가 유대민족과 함께 하였을 때에도 이 민족은 타락하고
범죄했소. 의 발현과 믿음은 그리 큰 상관관계가 없어 보이오. 그러나 증거는 필요하기에 주님은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고
그분이 예수요.

예수께서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소. 이 생명은 단지 세상에서 목숨이 아니라 구원받아 이르는 영생에 이르는 생명을
뜻하오.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나는 설명을 잘 할 수가 없소. 그것은 영생과 연결해서 이야기하여야 하는데 영생은 이미 인간의
이해 범주 밖의 일이기 때문이오. 정통 기독교 이론은 나는 생각하는 중이오.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인류'라는 단위가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지, 인간의 부분적인 타락, 처참한 죽음, 질병 등을 설명할 수 있는지 말이오. 다만 인류 역사상 영웅은 모두
적의 피로서 만들어진 것인데 구약의 하느님만 학살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오. 물론 나는 그 현상 너머에 내가
알지 못하는 인류의 구원에 대한 계획이 있을 거라고 믿으니까 그리스도인인 것이오.

몇 분이 비유에 대해 반론하셨소. 슬프게도 나의 졸필이 그 정도 조악한 비유밖에 하지 못함을 송구하게 생각하오.

궤변인지 비논리적인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소. 나는 믿는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니니까. 나는 아직도 좀 더 진리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 생각하고 있으니까.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회의원 때문에 정치를 혐오하고 냉대하는 것이 좋지 않듯이 대한민국 보수 개교 때문에 종교를 혐오하고
냉대하는 것도 좋지가 않소. 이런 저런 것들은 다 제쳐두고라도 우리 함께 사는 사회가 덜 불편하고 더 자유로울 수 있게 공동의
정의를 추구하길 모든 사람들에게 부탁 하오.

한국 교회에 진절머리가 난다면 무교회주의 (무교회앙)으로 접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오. 어째 꺼나 더 좋은 세상을
위해 기도하겠소.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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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연lius 2011.01.04 17:11
-짧은 감상
달은 둥글다. 6펜스 동전도 둥글다.
영웅은 인간이다. 찌질이도 인간이다.

-인상적이었던 문구

성욕은 건강한 것이지만 사랑은 병이다
신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지만 거기서 나오는 가루는 아주 곱다

-짧은 서평
지금 이 시대의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추천합니다.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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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연lius 2009.07.11 19:07

마키짱


내가 중학생 때 처음 들은 마키아벨리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어의 낯설음과 함께 날카로운 느낌의 음운 '키'가 포함되어 날카롭고 어려운 책을 집필하였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심어주었다. 게다가 그의 대표저서의 제목 '군주론' 역시 그야말로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낯선 서구학자의 이름과 너무나도 동양적인 제목의 책은 잘 연관이 되지 않아 괜한 거부감까지 가졌던 모양이다. 결국 나는 처음 들어본 이후 십 년이 되는 지금에서야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보다 쉽고 재미있다는 것은 둘째치고 다양한 교육을 받은 대학생으로서 이 책이 당시 로마 교황청의 금서로까지 지정된 사실을 동감하기 어려웠다. 이런 현상, 즉 당시 시대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지 못한 현대인으로서의 사고의 한계는 과거에도 느껴본 적이 있다. 그것은 삼국지연의를 읽으며 문, 무, 예술에 있어서 천재인 조조가 나관중에 의해 맹렬한 비난을 받는 것에 있어서였다. 아마도 난 현대까지 이르는 추잡하고 야비하기도 했던 질곡의 현대사를 알고 있기에 일종의 도덕 불감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후에 진수의 정사 삼국지와 다른 조조를 주인공으로 한 삼국지를 보며 나는 조조의 팬이 되었지만 그래도 조조가 시대의 비도덕자임은 틀림없고 이에 마키아벨리를 비교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나 마키아벨리의 저작은 군주론으로 이는 위왕 조조에게 바치는 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다만 두 사람의 역사적 시기를 생각해보면 마키아벨리가 조조를 연구해서 군주론을 써내었다고 생각하는 게 옳을 것이다. 만일 두 사람이 동시대에 동일지역에 살았다면 어떠하였을까 하는 물음에 나는 진궁이 떠올랐다. 조조를 섬기기로 했으나 여백사 사건으로 조조를 떠나 여포의 모사로써 조조에 대항해 싸우는 진궁은 나관중의 해석에 의하면 조조의 비도덕성에 반발해 여포에게 갔다고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여포는 양아버지마저 살해한 극악의 패륜아이기에 진궁이 도덕심 때문에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조에게는 자신의 재능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고 그 재능을 최대한 발휘 할 수 있는 곳으로 간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마키아벨리 역시 조조의 곁에 머물기보다는 유비에게 가서 유비의 강박적인 도덕관념을 고치려 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이런 역할을 제갈량 혹은 방통이 했기 때문에 유비는 익주를 차지하고 촉한을 건국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다시 조조로 돌아오자. 먼저 밝혔듯이 나는 조조의 팬이다. 또한 나는 니체의 팬이고 이에 공통점을 발견했다. 니체는 인간을 해방시킨 철학자이다. 니체는 개인을 종교, 윤리, 사회, 시대로부터 자유롭게 하자고 외치다 죽은 것이다. 조조도 마찬가지이다. 시대를 난세로부터 해방,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유학이라는 곪아버린 덫으로부터 인간의 재능을 해방시켰다. '불문불인불효 유재시거 不問不仁不孝 唯才是擧' 유교적 소양 이외에는 재능으로 인정하지 않던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한 조조는 소수 유학자를 죽이는 대신 다수의 인재를 부활시킨 것이다. 물론 조조의 이런 행위는 그의 철학적 사고보다는 필요에 의한 현실주의적 실용주의 사고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니체와 조조처럼 마키아벨리도 세계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조조가 유학과 인재를 분리시켜 보는 관점은 군주론의 가장 큰 가치로 여겨지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된 관점과 상통한다. 이는 실용적 합리주의의 원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군주론에서 '군주된 자는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그 공적을 충분히 포상해줄 줄 알아야 한다.'로 나타나는데 조조 역시 인재를 사랑하여 자신을 죽일뻔하고 자신의 큰아들 조앙을 죽게 한 장본인인 장수와 가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공적에 따라 직위와 포상을 내리는 모습은 국가적 덕을 이루기 위해 사적인 덕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공화정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썩어버린 국가의 개혁과 새로운 건국에는 1인의 강력한 군주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희생과 오명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력한 리더십은 조조뿐만 아니라 박정희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목적으로 가는 가장 빠른 수단을 마키아벨리즘이라고 한다면 개인이 아니라 국가에 있어서 이는 거부하기 어려운 미덕임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정치를 외양으로 보고 이를 적극적으로 조작하여 공적인 덕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가장과 기만, 위선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외양은 공적인 덕과 사적인 덕의 괴리를 줄여 줌으로 신민의 지지를 유지시키는데 조조가 선위를 제양 받아 황제가 되지 않고 마지막까지 천자를 모시는 신분으로 남은 것은 마키아벨리의 논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한의 마지막 황제에게 선양 받아 신(新)왕조를 연 왕망과 비교되곤 하는데 최초로 선양이라는 양식으로 외양을 가장하였으나 본질적인 목표인 국가의 개혁과 안정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왕조는 막을 내리고 후세 사가들에게 혹평을 받게 된다.

  신민의 안정을 위해 인정받는 군주에 대해 설파한 마키아벨리는 평화로운 치세를 위해 개인적인 덕으로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덕으로 최선을 선택하면서 개인적인 덕으로 최악을 피해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신민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치를 펼 수 있기 위해 군주의 군대가 있어야 한다고 여겼던 마키아벨리의 생각은 다른 말로 전쟁은 정치의 수호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전쟁과 정치를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조 역시 전쟁을 위한 후방의 보급을 든든히 하기 위한 정치는 전쟁과 같은 맥락에서 고려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이에 둔전제를 시행하여 훌륭한 성과를 달성하였다. 

군주론을 읽기 전에 즐기던 게임이 삼국지에 관련된 게임이었는데 군주론을 읽다 보니 자꾸 조조의 얼굴이 겹치며 다시금 삼국지를 읽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이런 형식의 독후감을 써 보았다. 반면에 삼국지와 관련된 마키아벨리즘은 이쯤에서 접어두고 한국 현대사나 세계 현대사를 들여다 보며 마키아벨리의 흔적을 찾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 것 같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쓸 수 있었던 중요한 점은 역사를 돌아보는 반성적 사고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불멸의 저서로 남은 중요한 점은 시대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시각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에 대한 판단과 무엇을 목표로 수단을 이용할 것인지는 순전히 나 혼자 해결해야 할 숙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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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연lius 2008.11.06 08:15
The book I've read is only a thin book for pupils.

Nevertheless That isn't easy for me. I belive also you are.

He died about 40 years ago. But He is a icon of nowadays.

Resistance, Revolution, Justice.

Someone said Latin America had need a hero, so he's become the hero.

What the truth is he fought for his ideal and died. That's enough for us.

Viva, Che! You reserve to ad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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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연lius 2005.10.2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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