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를 읽고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4)
현대는 바야흐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안티 기독교의 시대이다. 한국 기독교의 경우 일차적으로 그 수구적인 색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다. 또한 교회 내부의 경직된 구조나 투명성이 담보되지 않은 행정, 성도들 간의 갈등과 반목, 교회의 이합집산과 세포분열, 믿는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와 위선은 그런 비난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Non-Christian들의 기독교에 대한 비난은 위에 열거한 것 등의 근거를 지님으로 해서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위기는 공간적으로 한국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최근 들어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바로 ‘상대성’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神觀은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과 대척점에 서게 된다. 진화론에 바탕을 둔 자연과학의 패러다임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면을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게다가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나 최근의 ‘다빈치 코드’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부정하는 주장들 역시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같이 기독교의 위기는 시대적이면서 전세계적인 것이다. 부패와 위선, 본질적 신앙에서 멀어지는 교회의 행태 등 기독교 내적인 요소와 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 유행하는 거짓된 주장들과 기독교에 대해 오버된 안티 제스처 속에서 진정한 기독교가 과연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일까? 과연 그것은 가능한 것일까? 나는 그 동안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많이 던져 왔었다. 나만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은 이런 딜레마 속에서 괴로워하며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저 무조건 굳건한 믿음과 신앙의 순수성만 강조하는 것은 잘 하는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물론 신앙의 순수성과 굳건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기독교에 대해 강한 논리로 무장한 현대 사상과 문화의 도전이나 집요한 방해공작은 각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체험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앞에 무기력한 측면이 있다. 그 생생한 영적인 체험과 더불어 깊은 고뇌에서 나오는 실존적인 신앙은 말의 성찬으로 가득한 현대적 학문과 논리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극히 개인적인 체험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체험에 대한 해석의 관점은 누구나 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신앙인과 불신자간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교회에서는 늘 이렇게 말한다. “믿어지는 것이 은혜”라고. 맞는 말이다. 교회에 대한 공격이 이렇게 거센 상황에서도 매일같이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생생한 체험을 통해 신앙을 갖게 되어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은혜”로 인한 결과다. 당연하다. 하지만 외부의 공격과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하나님의 논리는 없는 것일까? 이론적으로 그것들을 반박할 수는 없는 것일까? 단순히 믿는 사람들만이 인정하고 수긍할 수 있는 직관적인 성격의 반박이 아닌 신앙인이든 불신자든 모두가 날카롭고 치밀하게 전개되는 이론적 담론으로 그 논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반박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바로 그 지점에 르네 지라르가 서 있었다.
많은 반기독교적 지식인들은 인류의 거의 모든 문명권에서 발견되는 신화에 주목한다. 그리고 신화에 등장하는 희생제의 형식의 스토리 구조와 복음서상의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이야기가 유사하다는 것을 들어 기독교가 어느 문화권에서나 있어 왔던 한편의 신화적 전승에 지나지 않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공격한다. 지라르는 신학자들이 이런 도전에 대한 응전을 기피하고 그것에 대항하는 이론적 탐구를 진행하지 않았음을 먼저 지적한다. 신학자들은 오히려 그런 도전을 외면하면서 인간의 실존과 같은 철학적인 문제로 도망가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지라르는 기독교적인 교리나 신학적인 전제를 아예 배제한 채 순수한 학문적인 차원에서 반기독교적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신화 속 희생제의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유사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 그것에 관해 더 깊이 들여다본다. 즉 반기독교적인 지식인들이 내세우는 전제를 끌어안으면서 그 논리를 그들보다 더 깊이 전개한다는 것이다.
지라르는 신화와 성서에 나오는 그 폭력 구조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던 중요한 차이를 발견해낸다. 그것은 바로 성서 속에 등장하는 희생양의 무고함이다. 신화에 나오는 희생양들은 결코 무고한 존재가 아니다. 그것들은 죽어 마땅한 이유, 죄가 있었다. 따라서 신화 속의 희생양은 결국 악마적 존재가 된다. 그 악마가 없어짐으로 인해 군중은 평온해진다. 반면 성서에 등장하는 희생양은 무고하다. 성서는 또 그 무고한 희생양을 죽인 군중의 악함을 그대로 고발한다. 이것이 바로 신화와 성서의 아주 중요하고 근본적인 차이점이 된다.
지라르는 폭력을 유발하는 근본 원인은 모방 욕망에 있다고 보았다. 모방 욕망은 경쟁 심리로부터 나온다. 경쟁 상대는 곧 내 욕망의 모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는 금방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가령, 갑이 을의 배우자를 보고 부러움과 질투를 느꼈다고 하자. 을은 그 동안 자신의 배우자에게 식어 있던 감정이 갑으로 인해 다시 뜨겁게 가열된다. 갑은 을을 모델로 하여 모방 욕망을 느낀 것이고 그에 따라 경쟁적으로 을도 모방 욕망을 느끼게 된다. 모방 욕망은 이런 구조 속에서 계속 모방 욕망을 낳게 되고 뜨거워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상승하게 된다. 여기서 배태된 질투는 숨은 원한과 증오를 만들어내며 그것은 폭력의 씨앗이 된다.
이러한 모방적 경쟁 상태는 사회 구성원들의 상호 관계를 폭력적인 무질서의 구조로 바꿔놓는다. 이러한 상태가 홉스식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이다. 지라르는 여기서 발전하여 모방 욕망을 일으키는 단서가 되는 것, 또는 모방적 경쟁상태 그 자체를 스캔들이라 규정한다. 문제는 스캔들이 하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수히 많은 스캔들이 있고 그것들은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스캔들은 짝패를 이루고 작은 스캔들은 그보다 더 큰 스캔들에 흡수된다. 스캔들 속의 짝패는 상호 적대적이지만 그것이 격화되면서 그 둘은 서로 닮아간다. 그리고 그것들은 어느새 더 큰 스캔들이 되는 상대에 대항해 일시적으로 협력하게 된다. 사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보게 된다. 이와 같이 스캔들의 더 큰 스캔들에 대한 수렴과정이 연쇄적으로 진행되면서 결국 가장 큰 스캔들 하나에 모든 스캔들이 흡수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런 예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보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군웅들이 할거하던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내적 혼란과 분열을 수습하기 위해 조선 침략에 나섰던 것이나, 2차대전 당시의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과 같은 것들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성서도 서로 적대적이었던 빌라도와 헤롯,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적대시하며 뭉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스캔들이 가장 강력한 단 하나의 스캔들로 흡수되는 상태. 지라르는 단 한명의 개인에 대해 공동체 전체가 동원되는 때가 바로 이 순간이라고 역설한다.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반대’는 ‘일인에 대한 만인의 반대’로 바뀌게 되고 그 반대로 말미암아 혼란과 무질서는 다시 질서를 잡게 된다. 이것이 지라르가 본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각 개인 간의 다분화되고 복합적인 다층적 갈등이 모방적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큰 스캔들이 되는 단 한 명에 대한 증오와 갈등으로 표출되고 결국 그를 죽이는 과정이 모방 폭력의 싸이클이자 희생양 메커니즘이 되는 것이다.
지라르가 설명하는 모방 싸이클 이론과 희생양 메커니즘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전율했다. 이 이론에 의해 온갖 왕따와 이지메 현상, 온갖 처세술이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잠시 개인적 경험을 이야기해보겠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우리 반에 어떤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애의 이름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따돌린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언제부턴가 아이들이 그 애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두 명이었는데 점차 그 수는 불어났다. 좀 지나자 우리 반 모두가 그 애를 따돌리고 있었다. 남자애들은 그 애를 욕했고, 여자애들은 그 애를 때리기까지 했다. 그 때 나는 그 애가 분명 불쌍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나서서 그 애를 변호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이들 앞에서 그 애를 변호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극단적 폭력의 왕따현상은 아니지만 공연한 놀림거리가 되는 사람, 그러니까 주위 사람들의 밥이 되는 사람을 보면 더욱 그렇다.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조롱하거나 놀리는 경우를 보게 된다. 당하는 사람이 느끼는 당황스러움이나 모멸감이 때로 그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럴 때 보통 사람들은 심하게 구는 사람에게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그냥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스스로 속인다. 당할만한 짓을 하니까 당하는 거라고. 그러면서 공격적인 사람들의 부당함을 목도하면서도 그들의 정당함을 애써 찾으면서 그들의 행동을 합리화시켜 해석하려 한다. 또한 그러한 린치를 당하는 사람의 처지에 민망함을 느끼면서도 애써 그 민망함을 외면하면서 한편으로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기 때문일 거라고 애써 부정적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무엇인가? 즉, 드러나는 분명한 것을 외면하면서 애써 이웃을 모방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볼 때에도 지라르가 설명하는 모방 경쟁의 소용돌이와 희생양 메커니즘은 진정으로 참이다.
지라르는 책에서 베드로의 예를 든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끌려가실 때 세 번 부인한 것을 기존의 신학에서는 베드로의 미숙함이나 심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판단한다. 그러나 지라르의 설명은 다르다. 베드로는 그 거대한 스캔들 속의 군중의 욕망에 전염되어 빨려 들어갔다는 것이다. 빌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살리고자 했지만 군중의 만장일치적인 스캔들에 의해 그 역시 전염되어 그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든 것이다. 일단 하나의 희생양을 향한 만인의 분노가 수렴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하나의 블랙홀이 된다. 거대한 중력으로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 분노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집단의 광기가 되고 마녀 사냥이 되는 것이다.
옮긴이 김진식은 역자 후기에서 지라르의 논점의 출발점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1. 신화와 성서에 나오는 폭력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2. 폭력에 대한 신화의 해석은 거짓이며, 성경의 해석은 참된 해석이다.
지라르는 오이디푸스 신화와 구약성경의 요셉의 이야기의 구조의 유사성을 비교하면서도 그 둘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제시한다. 오이디푸스와 요셉 모두 가족들로부터 추방을 당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 차이점이 있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통간할 운명이었다. 한마디로 추방하는 데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무고했고 형제들이 나빴다. 그러나 무고한 사람이 악한 사람들에 의해 추방을 당하는 것을 성경은 그대로 이야기한다. 이걸 좀더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지라르는 ‘초석적 살해’의 개념을 설명하고 기원전 2~3세기경의 아폴로니우스의 기적에 관한 예화를 분석한다. 그 논리 전개의 과정을 다 설명하기엔 너무 길다.(지금도 충분히 긴 것 같지만) 아무튼 여러 가지 인류학적인 사료들을 조사하면서 지라르가 도달하는 일차적인 결론은 신화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희생양은 무고한데, 그 희생양을 죄인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다. 희생양이 무고함을 강조한다. 집단적인 린치를 가하는 군중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성경은 더욱 강조한다. 그런데, 희생양의 무고함을 밀하는 텍스트는 성경 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방 싸이클이 가장 큰 스캔들로 수렴되는 단계에서 무한대의 중력을 가진 분노의 블랙홀을 형성하게 되면 그 때는 선과 악, 참과 거짓의 구분이 전도된다. 악이 선으로 둔갑하고 거짓이 참으로 둔갑한다. 절대 다수의 편이 선이 되고 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악이 된다. 그런데, 지라르는 예수 수난 이야기까지의 성경의 텍스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데까지는 학문적, 실증적인 방법을 통해 규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뛰어난 통찰력에 힘입은 것이 아니라 단순한 사실을 발견한 것이며 그것은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고 역설한다. 그럼, 이러한 단순한 사실을 왜 그 동안 많은 인류학자들이 발견해내지 못한 것일까? 지라르는 그들이 발견해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발견하려 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즉, 외면했다는 이야기다. 지라르는 신화와 성서의 희생양 스토리 구조의 유사성의 분석에서 더 깊게 들어가면 결국 종교적인 것과 만나게 되고 기독교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에 반기독교적인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변화될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라르는 니체의 이중유산을 설명한다. 니체의 의의와 한계를 지라르는 이렇게 설명한다.
“니체는 자신이 ‘디오니소스’라고 명명하는 신화와 제의에 나오는 집단 폭력이 예수 수난의 폭력과 같은 유형이란 것을 처음으로 알아낸 철학자다. 그에 의하면 이들의 차이는 모두 똑같은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해석의 차이라는 것이다.”
즉, 디오니소스든 예수든 똑같은 순교자라는 것이다. 이는 니체가 디오니소스는 죄인으로 보면서 예수는 무결한 존재로 보는 기독교의 배타성을 비판하는 것이다. 희생양의 무고함은 기독교만의 특수성이 아니라 모든 신화에 나오는 보편적인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지점은 지라르의 1차적 이론과 다를 바가 없다. 지라르 역시 신화 속의 희생양들을 무고한 존재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라르는 여기서 니체의 한계를 끄집어낸다. 니체는 그 지점을 넘어서 폭력의 부당성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즉, 동일한 전제에서 지라르와 니체는 서로 다른 길로 나아간다. 니체는 희생양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이다. 니체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주로 하층 계급에 속한다는 점에 착안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이교도 귀족들에 대한 그들의 원한을 만족시키기 위해 희생양들을 동정하고 있다는 비난을 퍼붓는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노예의 도덕’이다.
한마디로 말해, 니체는 거꾸로 군중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모방적 경쟁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다. 즉, 니체는 복음서가 단순히 강자 앞에 처한 약자의 편을 드는 편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보는 것인데, 이는 그야말로 니체가 기독교에 대한 반감에 사로잡혀 사안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라르는 말한다. 지라르가 볼 때 기독교의 의의는 모방 싸이클에서 나오는 강한 전염으로 인해 생기는 만장일치적 폭력에 균열을 내는 진실된 소수가 되라고 권고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지라르는 예수 수난의 지점까지 신, 구약의 여러 예화들과 신화들의 스토리 구조의 유사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도 희생양의 무고함을 말하고 군중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정직하게 지적하는 텍스트는 오직 성서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처음부터 어떤 신앙적인 선입견으로 연구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인류학적인 방법으로 성서와 신화를 비교연구하면서 그가 내리는 결론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지라르가 학문적인 방법으로 규명할 수 없는 부분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예수 부활 이후의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텍스트들이다.
지라르는 블랙홀을 만들어내는 강한 모방 폭력의 구조에 어떻게 소수의 반대파가 그에 대항할 수 있었느냐 하는 데에는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진실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진실을 모방 회오리에 사로잡힌 군중에게 설득하는 것은 어렵다. 즉, 소수는 강한 회오리 앞에 묻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잠시 지라르의 설명을 다소 길게 인용하겠다.
“예수가 체포되었을 때 유다는 이미 배반을 하였고 제자들은 흩어졌고, 베드로는 자신의 스승을 기꺼이 배반하였다. 모방의 회오리는 흔히 만장일치가 와해될 때에 잘 나타난다. 만약 모방의 회오리가 일어나서 이 모방이 정말 승리했다면, 지금 우리에게 복음서는 없고 또 하나의 신화만 보태졌을 것이다.
하지만 세 번째 날에는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모여드는데 그들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고 있다. 최후의 순간, 신화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소수의 반대파들이 박해 군중의 만장일치에 단호히 대항해서 일어선 것이다. 이 순간 박해자들은 더 이상 다수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이들의 숫자는 압도적으로 많지만, 그동안 일어난 일에 대한 그들의 생각, 즉 십자가에 대한 그들의 신화적인 표현을 이제부터는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수의 반대파들은 힘도 미미하고 권위도 없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건이 벌어진 뒤에야 행동을 하기 때문에 이들은 희생양 메커니즘의 진행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영웅적인 용기로 스스로를 다잡으며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긴다. 그 뒤에 이 기록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데, 이와 함께 희생양들이 부당하게 살해당했다는, 기존 질서를 완전히 뒤엎는 진실도 세계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게 된다.
얼마 안 남은 신도들도 이미 폭력의 전염에 반쯤 물들어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군중들과 예루살렘 당국에 반대하는 힘을 과연 어디에서 가져올 수 있었을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모방의 회오리의 거역하기 힘든 힘에 저항하는 이 같은 표변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라르는 이 힘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힘은 더 이상 학문적으로 논리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것이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상뿐이고 그 현상의 근원이 되는 힘은 이제 실증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에서 지라르가 보는 사탄은 인간의 모방 욕망과 그 싸이클에서 만들어지는 거대한 폭력의 회오리를 지칭한다. 그리고 사탄은 성경의 표현 그대로 이 세상의 왕인데, 그것은 지라르가 보는 것과 일치한다. 이 모방적 경쟁에서 나오는 집단 폭력은 모든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즉, 그 싸이클 자체가 하나의 권력인 셈이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규명하고 이것에 대해 승리하는 힘,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 셈이다.
많은 신학자들은 수많은 반기독교적인 문화인류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끌어댔던 근거들, 신화와 성서의 동일한 희생양 스토리 구조를 일부러 외면했다. 지라르는 예컨대, 화이트헤드가 기독교와 원시 부족 종교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을 애석해했다고 말한다. 또 불트만 같은 신학자는 그런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실존’이라는 주제에 기대어 끝까지 기독교를 붙잡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부딪치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인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단순한 이신론(理神論)에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지라르는 기독교의 엑기스이자 핵심인 ‘십자가 고난과 부활’이 오히려 더욱 기독교에 강한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임을 신학적인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문화인류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구현했다.
그리고 그는 현대에 들어와 희생양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반기독교적인 지식인들은 원래 기독교의 정신을 자기들의 것으로 대체하고 있다고 보았다. 히틀러는 니체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것을 두고 후세의 사람들은 히틀러가 니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고 있는데, 지라르의 관점은 다르다. 나치가 니체의 영향을 받은 것은 절대 이상한 것이 아닌데, 그것은 니체가 희생양의 편을 드는 기독교의 특성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말한 것에 있다고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니체를 좌파적 색채를 지닌 학자로서 아직 종교권력이 살아있던 때에 그에 반대했던 용기있는 사람으로 평가하지만 사실 니체는 보수적 색채에서 기독교의 색깔을 배제하고 극우로 치우쳐간 사람이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지라르의 이론을 다시 종합하면, 희생양은 무고하며 집단적인 린치를 가하는 군중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희생양은 모방적 경쟁 관계가 스캔들을 만들어내어 여러 스캔들이 단 하나의 스캔들에 수렴되면서 분노의 블랙홀을 형성할 때 만들어진다. 그 모방 욕망의 전염성은 매우 강하여 희생양에 대한 집단적인 린치를 만장일치적인 성격의 것으로 몰아간다. 그래서 탈무드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어떤 사람을 벌하는 데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다면 그를 풀어주어라. 그는 무고한 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러한 만장일치적인 폭력에 균열을 내고 희생양이 무고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유일한 텍스트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성서다. 신약은 그러한 진실을 용기를 내서 말한 소수의 사도와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록을 담고 있다. 지라르는 여기에 기독교의 의의가 있다고 말한다.
간단하다. 한번 생각해보라. 누군가에게 화가 났는데, 그 화를 만만한 사람에게 푼 적은 없었는지. 또 누군가에게 강한 경쟁심을 느끼면서 그가 잘하는 것을 나도 잘하려 한 적은 없었는지. 원래 관심도 없던 분야였는데 미묘한 경쟁심이 발동하여 자신도 모르게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는지. 그런 자신의 모방 욕망의 심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라르의 이론이 굉장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지라르는 이야기한다. 구약의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탐내지 말라는 금기 자체가 더욱 모방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안 예수님은 결국 “나에게 배우라, 나를 닮으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나르시시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으려는 예수님을 모방하라는 것이었다.
안티기독교의 거센 움직임 속에서 기독교인들마저 흔들리고 그들에게 동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조차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하나의 신화적인 아이콘으로 해석하고 그저 윤리적인 차원의 가르침을 수용하려 애쓴다. 그것 역시 모방 욕망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희생양에 대한 근심은 이제 기독교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대 철학의 주요한 관심사이다. 소외된 이웃과 사회적 소수자, 약자들을 향한 현대 이데올로기들의 너그러움과 관용은 그야말로 풍성하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어느 사회이건 희생양은 필요하다. 아직 희생양이 하나 남아있다. 그것은 기독교다. 모방적 경쟁관계 속에서 이제 다른 것을 희생양 삼을 수 없게 된 현대는 기독교를 희생양 삼고 있다. 그렇다고 기독교의 잘못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도가 지나친 반기독교적인 움직임은 기독교와 성경의 진정성까지 의심하게 만들고 그 모든 좋은 행동도 위선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 역시 희생양에 대한 관심이 극에 달한 오늘날에도 모방적 경쟁에서 비롯되어 거대한 분노와 폭력의 블랙홀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출처>
http://blog.naver.com/recuperate/70019409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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