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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7.26 르네상스
- 2007.10.30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를 읽고
- 2007.10.30 롤랑 바르트 - 저자의 죽음과 텍스트의 무의미
- 2007.10.30 위르겐 하버마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를 읽고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4)
현대는 바야흐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안티 기독교의 시대이다. 한국 기독교의 경우 일차적으로 그 수구적인 색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다. 또한 교회 내부의 경직된 구조나 투명성이 담보되지 않은 행정, 성도들 간의 갈등과 반목, 교회의 이합집산과 세포분열, 믿는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와 위선은 그런 비난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Non-Christian들의 기독교에 대한 비난은 위에 열거한 것 등의 근거를 지님으로 해서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위기는 공간적으로 한국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최근 들어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바로 ‘상대성’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神觀은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과 대척점에 서게 된다. 진화론에 바탕을 둔 자연과학의 패러다임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면을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게다가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나 최근의 ‘다빈치 코드’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부정하는 주장들 역시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같이 기독교의 위기는 시대적이면서 전세계적인 것이다. 부패와 위선, 본질적 신앙에서 멀어지는 교회의 행태 등 기독교 내적인 요소와 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 유행하는 거짓된 주장들과 기독교에 대해 오버된 안티 제스처 속에서 진정한 기독교가 과연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일까? 과연 그것은 가능한 것일까? 나는 그 동안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많이 던져 왔었다. 나만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은 이런 딜레마 속에서 괴로워하며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저 무조건 굳건한 믿음과 신앙의 순수성만 강조하는 것은 잘 하는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물론 신앙의 순수성과 굳건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기독교에 대해 강한 논리로 무장한 현대 사상과 문화의 도전이나 집요한 방해공작은 각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체험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앞에 무기력한 측면이 있다. 그 생생한 영적인 체험과 더불어 깊은 고뇌에서 나오는 실존적인 신앙은 말의 성찬으로 가득한 현대적 학문과 논리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극히 개인적인 체험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체험에 대한 해석의 관점은 누구나 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신앙인과 불신자간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교회에서는 늘 이렇게 말한다. “믿어지는 것이 은혜”라고. 맞는 말이다. 교회에 대한 공격이 이렇게 거센 상황에서도 매일같이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생생한 체험을 통해 신앙을 갖게 되어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은혜”로 인한 결과다. 당연하다. 하지만 외부의 공격과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하나님의 논리는 없는 것일까? 이론적으로 그것들을 반박할 수는 없는 것일까? 단순히 믿는 사람들만이 인정하고 수긍할 수 있는 직관적인 성격의 반박이 아닌 신앙인이든 불신자든 모두가 날카롭고 치밀하게 전개되는 이론적 담론으로 그 논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반박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바로 그 지점에 르네 지라르가 서 있었다.
많은 반기독교적 지식인들은 인류의 거의 모든 문명권에서 발견되는 신화에 주목한다. 그리고 신화에 등장하는 희생제의 형식의 스토리 구조와 복음서상의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이야기가 유사하다는 것을 들어 기독교가 어느 문화권에서나 있어 왔던 한편의 신화적 전승에 지나지 않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공격한다. 지라르는 신학자들이 이런 도전에 대한 응전을 기피하고 그것에 대항하는 이론적 탐구를 진행하지 않았음을 먼저 지적한다. 신학자들은 오히려 그런 도전을 외면하면서 인간의 실존과 같은 철학적인 문제로 도망가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지라르는 기독교적인 교리나 신학적인 전제를 아예 배제한 채 순수한 학문적인 차원에서 반기독교적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신화 속 희생제의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유사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 그것에 관해 더 깊이 들여다본다. 즉 반기독교적인 지식인들이 내세우는 전제를 끌어안으면서 그 논리를 그들보다 더 깊이 전개한다는 것이다.
지라르는 신화와 성서에 나오는 그 폭력 구조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던 중요한 차이를 발견해낸다. 그것은 바로 성서 속에 등장하는 희생양의 무고함이다. 신화에 나오는 희생양들은 결코 무고한 존재가 아니다. 그것들은 죽어 마땅한 이유, 죄가 있었다. 따라서 신화 속의 희생양은 결국 악마적 존재가 된다. 그 악마가 없어짐으로 인해 군중은 평온해진다. 반면 성서에 등장하는 희생양은 무고하다. 성서는 또 그 무고한 희생양을 죽인 군중의 악함을 그대로 고발한다. 이것이 바로 신화와 성서의 아주 중요하고 근본적인 차이점이 된다.
지라르는 폭력을 유발하는 근본 원인은 모방 욕망에 있다고 보았다. 모방 욕망은 경쟁 심리로부터 나온다. 경쟁 상대는 곧 내 욕망의 모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는 금방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가령, 갑이 을의 배우자를 보고 부러움과 질투를 느꼈다고 하자. 을은 그 동안 자신의 배우자에게 식어 있던 감정이 갑으로 인해 다시 뜨겁게 가열된다. 갑은 을을 모델로 하여 모방 욕망을 느낀 것이고 그에 따라 경쟁적으로 을도 모방 욕망을 느끼게 된다. 모방 욕망은 이런 구조 속에서 계속 모방 욕망을 낳게 되고 뜨거워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상승하게 된다. 여기서 배태된 질투는 숨은 원한과 증오를 만들어내며 그것은 폭력의 씨앗이 된다.
이러한 모방적 경쟁 상태는 사회 구성원들의 상호 관계를 폭력적인 무질서의 구조로 바꿔놓는다. 이러한 상태가 홉스식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이다. 지라르는 여기서 발전하여 모방 욕망을 일으키는 단서가 되는 것, 또는 모방적 경쟁상태 그 자체를 스캔들이라 규정한다. 문제는 스캔들이 하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수히 많은 스캔들이 있고 그것들은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스캔들은 짝패를 이루고 작은 스캔들은 그보다 더 큰 스캔들에 흡수된다. 스캔들 속의 짝패는 상호 적대적이지만 그것이 격화되면서 그 둘은 서로 닮아간다. 그리고 그것들은 어느새 더 큰 스캔들이 되는 상대에 대항해 일시적으로 협력하게 된다. 사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보게 된다. 이와 같이 스캔들의 더 큰 스캔들에 대한 수렴과정이 연쇄적으로 진행되면서 결국 가장 큰 스캔들 하나에 모든 스캔들이 흡수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런 예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보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군웅들이 할거하던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내적 혼란과 분열을 수습하기 위해 조선 침략에 나섰던 것이나, 2차대전 당시의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과 같은 것들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성서도 서로 적대적이었던 빌라도와 헤롯,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적대시하며 뭉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스캔들이 가장 강력한 단 하나의 스캔들로 흡수되는 상태. 지라르는 단 한명의 개인에 대해 공동체 전체가 동원되는 때가 바로 이 순간이라고 역설한다.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반대’는 ‘일인에 대한 만인의 반대’로 바뀌게 되고 그 반대로 말미암아 혼란과 무질서는 다시 질서를 잡게 된다. 이것이 지라르가 본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각 개인 간의 다분화되고 복합적인 다층적 갈등이 모방적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큰 스캔들이 되는 단 한 명에 대한 증오와 갈등으로 표출되고 결국 그를 죽이는 과정이 모방 폭력의 싸이클이자 희생양 메커니즘이 되는 것이다.
지라르가 설명하는 모방 싸이클 이론과 희생양 메커니즘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전율했다. 이 이론에 의해 온갖 왕따와 이지메 현상, 온갖 처세술이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잠시 개인적 경험을 이야기해보겠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우리 반에 어떤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애의 이름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따돌린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언제부턴가 아이들이 그 애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두 명이었는데 점차 그 수는 불어났다. 좀 지나자 우리 반 모두가 그 애를 따돌리고 있었다. 남자애들은 그 애를 욕했고, 여자애들은 그 애를 때리기까지 했다. 그 때 나는 그 애가 분명 불쌍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나서서 그 애를 변호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이들 앞에서 그 애를 변호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극단적 폭력의 왕따현상은 아니지만 공연한 놀림거리가 되는 사람, 그러니까 주위 사람들의 밥이 되는 사람을 보면 더욱 그렇다.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조롱하거나 놀리는 경우를 보게 된다. 당하는 사람이 느끼는 당황스러움이나 모멸감이 때로 그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럴 때 보통 사람들은 심하게 구는 사람에게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그냥 침묵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스스로 속인다. 당할만한 짓을 하니까 당하는 거라고. 그러면서 공격적인 사람들의 부당함을 목도하면서도 그들의 정당함을 애써 찾으면서 그들의 행동을 합리화시켜 해석하려 한다. 또한 그러한 린치를 당하는 사람의 처지에 민망함을 느끼면서도 애써 그 민망함을 외면하면서 한편으로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기 때문일 거라고 애써 부정적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무엇인가? 즉, 드러나는 분명한 것을 외면하면서 애써 이웃을 모방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볼 때에도 지라르가 설명하는 모방 경쟁의 소용돌이와 희생양 메커니즘은 진정으로 참이다.
지라르는 책에서 베드로의 예를 든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끌려가실 때 세 번 부인한 것을 기존의 신학에서는 베드로의 미숙함이나 심리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판단한다. 그러나 지라르의 설명은 다르다. 베드로는 그 거대한 스캔들 속의 군중의 욕망에 전염되어 빨려 들어갔다는 것이다. 빌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살리고자 했지만 군중의 만장일치적인 스캔들에 의해 그 역시 전염되어 그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든 것이다. 일단 하나의 희생양을 향한 만인의 분노가 수렴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하나의 블랙홀이 된다. 거대한 중력으로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 분노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집단의 광기가 되고 마녀 사냥이 되는 것이다.
옮긴이 김진식은 역자 후기에서 지라르의 논점의 출발점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1. 신화와 성서에 나오는 폭력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2. 폭력에 대한 신화의 해석은 거짓이며, 성경의 해석은 참된 해석이다.
지라르는 오이디푸스 신화와 구약성경의 요셉의 이야기의 구조의 유사성을 비교하면서도 그 둘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제시한다. 오이디푸스와 요셉 모두 가족들로부터 추방을 당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 차이점이 있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통간할 운명이었다. 한마디로 추방하는 데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무고했고 형제들이 나빴다. 그러나 무고한 사람이 악한 사람들에 의해 추방을 당하는 것을 성경은 그대로 이야기한다. 이걸 좀더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지라르는 ‘초석적 살해’의 개념을 설명하고 기원전 2~3세기경의 아폴로니우스의 기적에 관한 예화를 분석한다. 그 논리 전개의 과정을 다 설명하기엔 너무 길다.(지금도 충분히 긴 것 같지만) 아무튼 여러 가지 인류학적인 사료들을 조사하면서 지라르가 도달하는 일차적인 결론은 신화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희생양은 무고한데, 그 희생양을 죄인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다. 희생양이 무고함을 강조한다. 집단적인 린치를 가하는 군중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성경은 더욱 강조한다. 그런데, 희생양의 무고함을 밀하는 텍스트는 성경 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방 싸이클이 가장 큰 스캔들로 수렴되는 단계에서 무한대의 중력을 가진 분노의 블랙홀을 형성하게 되면 그 때는 선과 악, 참과 거짓의 구분이 전도된다. 악이 선으로 둔갑하고 거짓이 참으로 둔갑한다. 절대 다수의 편이 선이 되고 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악이 된다. 그런데, 지라르는 예수 수난 이야기까지의 성경의 텍스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데까지는 학문적, 실증적인 방법을 통해 규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뛰어난 통찰력에 힘입은 것이 아니라 단순한 사실을 발견한 것이며 그것은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고 역설한다. 그럼, 이러한 단순한 사실을 왜 그 동안 많은 인류학자들이 발견해내지 못한 것일까? 지라르는 그들이 발견해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발견하려 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즉, 외면했다는 이야기다. 지라르는 신화와 성서의 희생양 스토리 구조의 유사성의 분석에서 더 깊게 들어가면 결국 종교적인 것과 만나게 되고 기독교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에 반기독교적인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변화될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라르는 니체의 이중유산을 설명한다. 니체의 의의와 한계를 지라르는 이렇게 설명한다.
“니체는 자신이 ‘디오니소스’라고 명명하는 신화와 제의에 나오는 집단 폭력이 예수 수난의 폭력과 같은 유형이란 것을 처음으로 알아낸 철학자다. 그에 의하면 이들의 차이는 모두 똑같은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해석의 차이라는 것이다.”
즉, 디오니소스든 예수든 똑같은 순교자라는 것이다. 이는 니체가 디오니소스는 죄인으로 보면서 예수는 무결한 존재로 보는 기독교의 배타성을 비판하는 것이다. 희생양의 무고함은 기독교만의 특수성이 아니라 모든 신화에 나오는 보편적인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지점은 지라르의 1차적 이론과 다를 바가 없다. 지라르 역시 신화 속의 희생양들을 무고한 존재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라르는 여기서 니체의 한계를 끄집어낸다. 니체는 그 지점을 넘어서 폭력의 부당성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즉, 동일한 전제에서 지라르와 니체는 서로 다른 길로 나아간다. 니체는 희생양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이다. 니체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주로 하층 계급에 속한다는 점에 착안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이교도 귀족들에 대한 그들의 원한을 만족시키기 위해 희생양들을 동정하고 있다는 비난을 퍼붓는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노예의 도덕’이다.
한마디로 말해, 니체는 거꾸로 군중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모방적 경쟁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다. 즉, 니체는 복음서가 단순히 강자 앞에 처한 약자의 편을 드는 편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보는 것인데, 이는 그야말로 니체가 기독교에 대한 반감에 사로잡혀 사안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라르는 말한다. 지라르가 볼 때 기독교의 의의는 모방 싸이클에서 나오는 강한 전염으로 인해 생기는 만장일치적 폭력에 균열을 내는 진실된 소수가 되라고 권고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지라르는 예수 수난의 지점까지 신, 구약의 여러 예화들과 신화들의 스토리 구조의 유사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도 희생양의 무고함을 말하고 군중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정직하게 지적하는 텍스트는 오직 성서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처음부터 어떤 신앙적인 선입견으로 연구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인류학적인 방법으로 성서와 신화를 비교연구하면서 그가 내리는 결론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 지라르가 학문적인 방법으로 규명할 수 없는 부분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예수 부활 이후의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텍스트들이다.
지라르는 블랙홀을 만들어내는 강한 모방 폭력의 구조에 어떻게 소수의 반대파가 그에 대항할 수 있었느냐 하는 데에는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진실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진실을 모방 회오리에 사로잡힌 군중에게 설득하는 것은 어렵다. 즉, 소수는 강한 회오리 앞에 묻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잠시 지라르의 설명을 다소 길게 인용하겠다.
“예수가 체포되었을 때 유다는 이미 배반을 하였고 제자들은 흩어졌고, 베드로는 자신의 스승을 기꺼이 배반하였다. 모방의 회오리는 흔히 만장일치가 와해될 때에 잘 나타난다. 만약 모방의 회오리가 일어나서 이 모방이 정말 승리했다면, 지금 우리에게 복음서는 없고 또 하나의 신화만 보태졌을 것이다.
하지만 세 번째 날에는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모여드는데 그들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고 있다. 최후의 순간, 신화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소수의 반대파들이 박해 군중의 만장일치에 단호히 대항해서 일어선 것이다. 이 순간 박해자들은 더 이상 다수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이들의 숫자는 압도적으로 많지만, 그동안 일어난 일에 대한 그들의 생각, 즉 십자가에 대한 그들의 신화적인 표현을 이제부터는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수의 반대파들은 힘도 미미하고 권위도 없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건이 벌어진 뒤에야 행동을 하기 때문에 이들은 희생양 메커니즘의 진행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영웅적인 용기로 스스로를 다잡으며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긴다. 그 뒤에 이 기록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데, 이와 함께 희생양들이 부당하게 살해당했다는, 기존 질서를 완전히 뒤엎는 진실도 세계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게 된다.
얼마 안 남은 신도들도 이미 폭력의 전염에 반쯤 물들어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군중들과 예루살렘 당국에 반대하는 힘을 과연 어디에서 가져올 수 있었을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모방의 회오리의 거역하기 힘든 힘에 저항하는 이 같은 표변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라르는 이 힘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힘은 더 이상 학문적으로 논리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것이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상뿐이고 그 현상의 근원이 되는 힘은 이제 실증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에서 지라르가 보는 사탄은 인간의 모방 욕망과 그 싸이클에서 만들어지는 거대한 폭력의 회오리를 지칭한다. 그리고 사탄은 성경의 표현 그대로 이 세상의 왕인데, 그것은 지라르가 보는 것과 일치한다. 이 모방적 경쟁에서 나오는 집단 폭력은 모든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즉, 그 싸이클 자체가 하나의 권력인 셈이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규명하고 이것에 대해 승리하는 힘,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 셈이다.
많은 신학자들은 수많은 반기독교적인 문화인류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끌어댔던 근거들, 신화와 성서의 동일한 희생양 스토리 구조를 일부러 외면했다. 지라르는 예컨대, 화이트헤드가 기독교와 원시 부족 종교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을 애석해했다고 말한다. 또 불트만 같은 신학자는 그런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실존’이라는 주제에 기대어 끝까지 기독교를 붙잡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부딪치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인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단순한 이신론(理神論)에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지라르는 기독교의 엑기스이자 핵심인 ‘십자가 고난과 부활’이 오히려 더욱 기독교에 강한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임을 신학적인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문화인류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구현했다.
그리고 그는 현대에 들어와 희생양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반기독교적인 지식인들은 원래 기독교의 정신을 자기들의 것으로 대체하고 있다고 보았다. 히틀러는 니체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것을 두고 후세의 사람들은 히틀러가 니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고 있는데, 지라르의 관점은 다르다. 나치가 니체의 영향을 받은 것은 절대 이상한 것이 아닌데, 그것은 니체가 희생양의 편을 드는 기독교의 특성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말한 것에 있다고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니체를 좌파적 색채를 지닌 학자로서 아직 종교권력이 살아있던 때에 그에 반대했던 용기있는 사람으로 평가하지만 사실 니체는 보수적 색채에서 기독교의 색깔을 배제하고 극우로 치우쳐간 사람이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지라르의 이론을 다시 종합하면, 희생양은 무고하며 집단적인 린치를 가하는 군중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희생양은 모방적 경쟁 관계가 스캔들을 만들어내어 여러 스캔들이 단 하나의 스캔들에 수렴되면서 분노의 블랙홀을 형성할 때 만들어진다. 그 모방 욕망의 전염성은 매우 강하여 희생양에 대한 집단적인 린치를 만장일치적인 성격의 것으로 몰아간다. 그래서 탈무드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어떤 사람을 벌하는 데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다면 그를 풀어주어라. 그는 무고한 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러한 만장일치적인 폭력에 균열을 내고 희생양이 무고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유일한 텍스트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성서다. 신약은 그러한 진실을 용기를 내서 말한 소수의 사도와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록을 담고 있다. 지라르는 여기에 기독교의 의의가 있다고 말한다.
간단하다. 한번 생각해보라. 누군가에게 화가 났는데, 그 화를 만만한 사람에게 푼 적은 없었는지. 또 누군가에게 강한 경쟁심을 느끼면서 그가 잘하는 것을 나도 잘하려 한 적은 없었는지. 원래 관심도 없던 분야였는데 미묘한 경쟁심이 발동하여 자신도 모르게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는지. 그런 자신의 모방 욕망의 심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라르의 이론이 굉장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지라르는 이야기한다. 구약의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탐내지 말라는 금기 자체가 더욱 모방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안 예수님은 결국 “나에게 배우라, 나를 닮으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나르시시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으려는 예수님을 모방하라는 것이었다.
안티기독교의 거센 움직임 속에서 기독교인들마저 흔들리고 그들에게 동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조차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하나의 신화적인 아이콘으로 해석하고 그저 윤리적인 차원의 가르침을 수용하려 애쓴다. 그것 역시 모방 욕망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희생양에 대한 근심은 이제 기독교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대 철학의 주요한 관심사이다. 소외된 이웃과 사회적 소수자, 약자들을 향한 현대 이데올로기들의 너그러움과 관용은 그야말로 풍성하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어느 사회이건 희생양은 필요하다. 아직 희생양이 하나 남아있다. 그것은 기독교다. 모방적 경쟁관계 속에서 이제 다른 것을 희생양 삼을 수 없게 된 현대는 기독교를 희생양 삼고 있다. 그렇다고 기독교의 잘못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도가 지나친 반기독교적인 움직임은 기독교와 성경의 진정성까지 의심하게 만들고 그 모든 좋은 행동도 위선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 역시 희생양에 대한 관심이 극에 달한 오늘날에도 모방적 경쟁에서 비롯되어 거대한 분노와 폭력의 블랙홀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출처>
http://blog.naver.com/recuperate/70019409779
“우리의 목적은 텍스트의 복수성을, 그 의미현상의 열림을 생각하고 상상하고 체험하는 데 있다.” - Roland Barthes
바르트의 텍스트 분석
바르트에게 있어 의미작용은 소쉬르의 기호학적인 개념으로 닫혀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구성된다. 그런데, 소쉬르는 언어에 대해 구조주의적인 사유를 하고 있었기에 그 의미작용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기호 안의 기의가 확정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일한 기의라고 해도 분명 사람마다 기호에 대해 갖게 되는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바르트는 의미와 구별되는 ‘가치’의 개념을 사용한다. ‘가치’의 개념은 의미를 기표와 연결된 기의로 보는 의미작용이 차이점을 드러내지 못하는 난점을 해결해준다. ‘가치’의 개념에서는 의미를 하나의 ‘즉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면서도 무한한 조합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이 ‘가치’의 개념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현상의 ‘열림’과 ‘복수성’을 상상하고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텍스트 분석은 이제 어떤 방식으로 구조가 잡혀있느냐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구조를 만들어내느냐를 관찰한다. 그렇다고 바르트가 구조분석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고정된 의미가 있는 대상은 ‘구조’를 관찰하여 그 의미작용의 체계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구조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바르트는 텍스트 분석을 통해 의미작용(signification)이 아닌 구축과 결합을 통해서 새롭게 의미가 생산되는 것을 관찰하고자 한 것이다. 바르트는 이를 의미현상(signifiance)이라 명명한다. 즉, 텍스트 안의 모든 것은 무엇인가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 의미의 합이 보다 궁극적인 구조나 더 큰 의미를 대변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합성의 오류’가 되고 만다. 결국, 텍스트는 열려 있고 그 조합은 무한하며 새로운 의미 생산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의 열림과 새로운 의미생성에 대한 전형적인 예로 윤동주의 시 ‘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肝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우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야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위 시에는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별주부전의 내용과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내용이 혼합되어 있다. 시인은 시적 자아의 고귀한 품성이나 양심을 ‘간’으로 은유하면서 두 설화의 텍스트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내고 있는데, ‘토끼’의 경우 욕심이 많으면서도 잔꾀와 기지가 살아있는 원래 ‘별주부전’의 캐릭터에서 벗어나 습해지기 쉬운 ‘간’을 양지바른 곳에 말리면서 또한 소중히 다루는 모습을 나타내면서 프로메테우스와 중첩되어 시적 자아를 형상화하고 있다. 윤동주는 이 시에서 이미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의 열림과 그 복수성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의 죽음
바르트는 기표로서의 텍스트가 만드는 의미의 다양함을 드러내기 위해 이야기의 단위로 렉시(lexies)를 사용한다. 이는 체계적인 단위가 아니라 바르트가 임의로 사용한 읽기단위이다. 발자크의 단편소설 Sarrasine를 분석한 ‘S/Z'에서 바르트는 3개의 렉시에서 5개의 코드를 발견하고 그 코드들에 의한 느린 독서를 시행한다. 여기서의 코드는 텍스트를 읽는 하나의 프레임이자 그것을 사로잡는 그물인데, 코드가 5개로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바르트는 신약성경의 사도행전 10:1~3을 12개의 코드로 나누기도 한다.
바르트는 이런 방식으로 의미가 생성될 수 있는 모든 기표로부터 코드를 꺼내고자 한다. 이렇게 하여 개개의 렉시들은 텍스트가 전개되어 감에 따라 코드에 의해 서로 섞이고 겹쳐진다. 바르트에 의하면 각각의 코드는 텍스트에 담겨 있는 하나의 목소리에 불과한 반면, 텍스트는 단 하나의 목소리가 아닌 여러 소리가 합쳐진 ‘네트워크’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 주장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상호텍스트’라는 개념에서 비롯된 것인데, 하나의 텍스트는 항상 또다른 텍스트와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바르트 자신도 이미 1968년 후기 구조주의자로서 이론을 폈던 최초의 논문 ‘저자의 죽음’에서 비슷한 주장을 편 적이 있다. 이는 한 마디로 저자가 텍스트의 기원이라는 설을 부인한다. 텍스트는 항상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이전의 텍스트를 반영한 것이고 때로는 파생적 아이디어, 변종, 표절과 패러디를 통해 존재하는 것이지, 더 이상 작가의 오리지널한 저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작가는 코드를 발송하는 사람의 위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예는 무수히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사회계약론’에서 장 자크 루소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군주주권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밀하게 공화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는데, 이런 해석은 마키아벨리의 ‘로마사논고’의 텍스트와 비교하면서 얻어진 결론이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프로이트는 인간의 금기된 성적 욕망의 표현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똑같은 텍스트에서 르네 지라르는 다른 신화와의 비교를 통해 모든 신화에 내재된 희생양 제의를 발견, 무고한 1인에 대한 만인의 집단적 폭력을 통해 사회가 질서를 회복한다는 논의를 전개하면서 신화는 그 무고한 1인이 희생될만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렇듯, 하나의 텍스트는 다양한 코드를 통해서 또 다른 텍스트와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새로운 의미를 구축하고 생성하게 되고 독자 또는 수용자는 이제 텍스트를 능동적으로 독해하며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자기의 처지와 구미에 맞게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게 된다.
텍스트와 쾌락, 이데올로기에서 무의미로
이후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쾌락(pleasure)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 하나는 황홀경이나 희열(jouissance)로서 굳이 성적으로 표현하면 오르가즘과 비슷한 개념이다. 다른 하나는 희열보다 다소 약한 개념으로 평범한 ‘재미’(fun)를 말한다. 이 두 가지의 차이는 텍스트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바르트는 텍스트를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writerly text)와 읽혀질 수 있는 텍스트(readerly text) 두 가지로 구분한다.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는 독자가 자신의 입장에 맞게 해석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끔 열려 있는 텍스트를 의미한다. 영화로 예를 들자면 미장센을 중시하면서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롱테이크로 화면을 처리하는 약간 지루하고 느린 영화가 있다. 이런 영화는 관객이 자율적으로 화면 어딘가를 응시할 수 있으며 화면에 담겨진 주변적인 풍경과 소품들을 음미할 수 있게 된다. 주로 유럽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고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도 그런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한편, 읽혀질 수 있는 텍스트는 독자가 한 가지 지배적인 의미로만 읽기를 강요당하는 닫혀 있는 텍스트이다. 화면전환이 빠르고 카메라가 자주 움직이는 그런 영화들, 대표적으로 헐리웃 액션영화가 이런 문법을 따르고 있는데, 이런 영화들은 관객이 말 그대로 카메라의 흐름을 따라서 다시 말하면 감독이 인도하는 그대로 시선을 옮기면서 수동적으로 재미를 느끼게 된다.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 등의 문학에서도 이런 작품들이 등장한다.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로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이나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의 부조리극,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회화 등을 추가로 예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바르트에 의하면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가 희열을 준다면 읽혀질 수 있는 텍스트는 평범한 재미를 주는 것에 그치고 만다. 당연히 바르트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이며, 어떤 텍스트든지 궁극적으로는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는 대부분 지루하고 난해하며 때로는 무의미에 가깝다. 결국 바르트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의미이다. 읽혀질 수 있는 텍스트도 메타적으로 읽히면 그 신화의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게 되는데, 다시 그것은 궁극적으로 무의미로 회귀한다. 다시 말하면 무의미란 단순히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마저 근본적으로 의미를 박탈당하고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바르트는 이를 통해 신화론의 ‘이데올로기’에서 ‘무의미’로 한 발 더 나아간 셈이다.
그렇다면, 왜 무의미인가? 바르트는 세상의 모든 의미들은 인간을 억압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텍스트에서 의미를 박탈하여 억압의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쾌락적 유희에 이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는 68혁명으로부터 온 환멸감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를 뒤흔들었던 68혁명은 다양한 의제들을 분출시켰지만 수렴되지 않는, 즉 발산해버리는 반항의 에너지는 결국 혼란과 무기력으로 빠져들고 만 것이다. 여기서 오는 환멸감으로 인해 거대 정치담론마저 결국 하나의 신화로, 이데올로기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사회의 신념체계를 떠받드는 언어의 구조를 불신하면서 그 모든 텍스트에서 의미를 박탈하고자 했던 것이다.
바르트의 한계와 의의
바르트가 후기 텍스트 분석을 통해 무의미로 나아간 것은 왠지 필연적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초기에 바르트는 ‘신화론’에서 이미지의 기표와 기의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 2차적인 기의를 찾고 그것이 어떻게 신화로 기능한지를 분석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바르트 스스로도 인정하다시피, 신화를 파헤친 그 신화분석가의 견해마저도 또 하나의 신화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신화의 이데올로기를 밝혀내는 작업마저 다시 신화가 되어버리는 것, 그것이 첫 번째 한계이다. 따라서 바르트가 결국 그 신화의 이데올로기에서 텍스트의 무의미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바르트의 ‘무의미’는 사회학적으로 적용할 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이런 무의미는 궁극적으로 포스트모던의 특징이다. 의미의 박탈, 개인의 해방이 과연 무엇을 담보하는가, 다시 상투적인 비판으로 돌아오면 결국 대안은 없게 된다. 바르트를 넘어 포스트모던 일반으로 넘어가게 되면 이들의 논의는 거칠게 말해 ‘머리가 아프니까 목을 자르자’는 식의 이야기로 들린다. 텍스트에서 의미를 박탈하여 모든 거대 담론들을 불신하고 부정하는 행위가 왠지 성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이성과 교제하다가 몇 번의 실패와 상처를 거듭했다고 모든 이성을 불신하며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는 사람처럼 약간 애처롭다. 기득권에 대한 대항담론이 문제를 드러내면 다시 변증법적으로 발전된 새로운 담론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닫혀진 텍스트를 유연하게 열린 텍스트의 성질로 바꾸면서 교조성을 지양하면서 보다 민주적인 담론으로 새롭게 의미를 생산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기에 차라리 하버마스가 민주적 의사소통의 공론장을 만들자는 대안이 차라리 보다 더 설득적으로 들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바르트의 의의는 있다. 그는 소쉬르의 기호학적 방법론으로 ‘언어’를 넘어 잡지의 이미지, 패션잡지의 모드, 문학작품과 텍스트 등 기호연구의 범위를 확장하여 탐구하였다. 또한 그는 사회를 해석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가들의 이론을 접목시켜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키고 대중이 읽기 쉽게 글을 썼던 몇 안 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모든 언어와 이미지와 이야기들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움이 궁극적으로 신화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무엇이든 보이는 그대로 믿지 말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즉, 바르트는 새로운 인식론의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신화적 자연스러움을 폭로하고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바르트는 자신의 분석마저 하나의 신화이자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결국 수용자 개개인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독해가 중요함을 역설하였던 인식론의 민주주의를 개척한 사람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방향이 결국 허무주의와 도착적 쾌락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이 한계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recuperate/70019473811
위르겐 하버마스
의사소통적 이성을 통한 계몽의 현대적 기획
I. 계몽의 위기와 ‘계몽의 변증법’의 한계
근대 계몽주의는 진보에 대한 무한한 믿음과 이를 통한 인간해방이라는 위대한 이상을 인류에게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을 실현케 해준다고 믿었던 것은 인간의 이성이었다. 계몽주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포가 인간의 무지로부터 비롯되었고, 그것이 종교적 세계관을 낳았다고 보았다. 이성과 합리적 사고는 이러한 인간을 무지로부터 해방시킴과 동시에 더 이상 자연을 공포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막스 베버는 근대의 이러한 합리화과정을 탈마법화과정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이성에 대한 과신은 문명을 발전시켰지만 그와 동시에 문명의 위기를 낳았다. 합리성으로 무장한 근대의 3가지 요소, 즉,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경제학, 그리고 관료적 행정시스템은 환경파괴와 핵전쟁에 대한 공포, 물질만능주의와 인간소외의 문제를 낳았던 것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러 서구의 사상가들은 바로 이러한 문명의 위기를 지각하고 있었다. 특히, 20세기 전반기의 프랑크푸르트학파로 대표되는 비판이론가들은 계몽의 본래 의도와 그것이 가져온 결과 사이의 커다란 괴리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려고 하였는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그 대표적인 저서이다.
‘계몽의 변증법’은 수학적 논리로 자연과 인간의 모든 것을 획일화하고 도구화하는 ‘도구적 이성’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이는 자연과 인간이 지니는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망각하게 하였고, 그 결과 나타난 것이 현대세계의 총체적 소외이며, 20세기의 전체주의적 국가체제의 출현은 그러한 소외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계몽의 변증법’은 음울한 시대를 해석하고 진단할 뿐, 그것을 극복할 적절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했다.
II. 인식론적 객관주의에 대한 비판
하버마스는 1968년 ‘인식과 관심’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아도르노 진영과 포퍼 진영 사이의 ‘실증주의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결론적으로 순수한 객관적 인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인식에는 이것을 인도하는 이해관계와 관심이 동반된다고 주장하여 아도르노와 입장을 같이 하였다.
하버마스는 현실과 관련된 다양한 인식관심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그것은 ‘기술적인 인식관심’과 ‘실천적인 관심’이다. 기술적인 인식관심은 경험적이고 분석적인 학문, 즉 자연과학에 있어서 지배적이며 실천적인 관심은 역사학, 해석학적인 학문, 즉 정신과학에 있어서 지배적이다. 그리고 자연과 사회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해결해 내려는 노력이 우리를 학문연구로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현실적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식은 없을 수 없다고 보았다. 즉, 문제해결을 위한 실천적 관심의 차원에서 하버마스가 보는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사회적 실천가능성, 그것도 인간의 능동적인 역할에 의한 실천가능성을 담보하여 해방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버마스가 두 사람의 칼(Karl), 즉 Karl Marx와 Karl Popper를 비판하는 부분에서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하버마스는 사회현상을 가치판단의 개입 없이 과학적인 분석을 시도하고자 하는 포퍼의 실증주의나 하부구조에 의한 경제결정론에 집착하는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인간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능력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된 해방의 가능성을 열어주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이러한 비판적 성찰을 보여주는 학문적 모델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발견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치료, 즉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이 의사의 일방적인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사는 환자와의 대화를 통해 환자가 근본적인 자기성찰에 이르도록 이끌 뿐이며 따라서 치료를 위해서는 환자 자신의 능동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 게다가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러한 자기성찰을 환자뿐만 아니라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에게도 요구한다. 정신분석학은 이처럼 해방이 인간주체의 자기성찰과 능동적 실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에게 중요성을 지닌다. 그와 동시에 하버마스는 정신분석학이 성찰과 실천의 차원에서 이탈하여 인간의 심리적 발전과정을 객관주의적 이론으로 정립하려 하는 시도는 단호히 비판한다. 즉, 그러한 시도는 인간을 자연과학적 법칙성에 종속시키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의 심리를 유년기의 성적 체험의 고착, 즉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설명하려는 프로이트의 시도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마르크스 비판도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된다. 즉, 마르크스는 사적 유물론을 통해 하부구조가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처럼 파악하여 인간주체의 능력이 지니는 가능성을 성찰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인식론적 객관주의는 인간을 과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하나의 대상으로만 파악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율적이며 능동적인 면을 무시하고 억압과 폭력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III. 의사소통적 이성
아도르노의 한계는 이성 중심의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대체할 다른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 이성을 도구적 이성으로만 파악한 데에서 기인한다. 보편적 이성을 오로지 도구적 이성으로만 파악하는 사유가 해방을 위한 공동의 사회적 실천 가능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공동의 선을 위한 공동의 실천은 어쨌든 보편적 이성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이러한 이성을 언어의 상호주관성에서 발견하여 아도르노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다.
하버마스 입장에서는 ‘도구적 이성’을 비판하고 있는 사유 또한 이성적 사유이다. 그것은 도구적 이성을 넘어선 이성으로서 하버마스는 이것을 의사소통적 이성으로 파악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도구적 이성의 주관적 폐쇄성과 획일성, 그리고 폭력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개방적이고 상호적인 이성이 확보되면 민주적 종합, 다시 말해 비폭력적 보편성도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의사소통적 이성을 통해 본래 계몽이 꿈꾸었던 기획, 즉 인류의 진보와 공동선의 미래에 대한 실현도 다시 가능해진다. 이런 측면에서 하버마스의 철학은 진보적 낙관주의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그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앞 절에서 우리는 하버마스가 인식론적 객관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하버마스는 인식을 구성하는 관심과 그에 상응하는 영역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형식으로 분류한다.
∘실증주의적인 인식관심 - 물질적 생산과 교환의 경제적 영역
∘신비주의적인 인식관심 - 상징적 상호작용과 관련된 의사소통의 영역
∘비판적∙해방적 인식관심 - 인간사회의 권력 및 지배관계의 영역
하버마스에 따르면 각각의 인식관심 영역은 고유성을 지니며 이들을 포괄할 수 있는 단일한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마르크스가 토대가 상부구조까지도 결정한다고 본 것과 달리 하버마스는 상부구조 역시 그 나름의 자율적인 기능과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경제적 생산력으로서의 노동과 상호작용을 구분하고 이 양자 사이의 관계가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상호작용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반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하버마스는 노동과 상호작용을 엄격히 구분하여 노동을 도구적 행위로, 상호작용을 의사소통적 행위로 구분하면서, 현대사회의 문제는 도구적 이성의 만연에 의해 물질적 영역이 의사소통의 의미 영역인 상징적 상호작용의 영역을 과도하게 침범하고 훼손한 데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도구적 이성의 일면적 강조에 의해 의사소통의 상호성과 의미가 체계적으로 왜곡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기서 하버마스의 논의는 마르크스와 차이점을 갖게 된다. 마르크스는 복잡한 사회의 문제를 단순화시켜 온 관심을 하부구조의 영역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자본가들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노동의 소외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이 되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끝장내야 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적인 혁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반면 하버마스에 따르면 하부구조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 사회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물질적 생산과 교환의 영역 이외의 영역을 고려하지 않은 도구적 이성 중심의 단순한 해법은 또 다른 모순을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구적 이성에 의해 왜곡된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사회적 모순의 해결은 그 사회가 어느 정도로 그것을 공론화하여 지양할 수 있는 가에 달려 있으며 참된 진보의 척도는 사회구성원들이 그에 대한 장애요소를 함께 인식하고 자율적 합의를 통해 그것을 공동으로 제거해 나가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신분석 치료자가 환자와 의사소통을 통해 질병을 치료해나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IV. 체계와 생활세계
하버마스의 논의를 보다 쉽고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하버마스 자신이 내세운 ‘체계’와 ‘생활세계’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 절에서 하버마스는 인식관심의 영역을 세 가지로 나누었는데, 하버마스는 이를 기반으로 해서 사회구성체를 체계와 생활세계로 구분하였다. 생활세계는 '언어'와 '행위'의 주체로서 인간들이 합리적 토론을 통해 진리를 상호 검증할 수 있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가능한 세계로서 인간 행위와 경험이 갖는 의미를 공유하는 영역이다. 반면, 체계는 간단히 말하면 물질적 자원의 생산과 교환의 영역으로 마르크스의 ‘토대’개념과 유사하다. 하지만 체계는 경제적 하부구조의 의미만이 아니라 상부구조의 정치와 행정의 영역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토대와는 약간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근대 이전에는 체계는 사회구성원들에 의해 통제 가능했으며 따라서 사회는 평온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하나의 체계로서, 사회체계를 살펴보면, 사회체계는 사회구성원(내적자연)과 자연자원(외적자연)으로 이루어지는데 사회구성원은 말 그대로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자연 자원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적 자원을 말한다.
여기서 사회적 환경과의 교류에서 사회구성원들이 사회화되는 것을 내적자연의 사회화라고 하고 (ex. 가정, 학교, 법, 문화) 사회체계가 필요로 하는 물적 자원이 외적자연으로부터 공급되는 것을 외적자연의 사회화라 한다. (ex. 의복, 음식, 집, 화폐) 그런데, 여기서 외적자연의 사회화는 "조직원리"에 따라 운영된다. 조직원리란 조직은 운영하는 방식, 사회를 운영하는 방식 (ex. 법 ; 신호등이 파란 불일 때 길을 건널 수 있다)이다. 이러한 조직원리는 한 사회가 그 사회의 동질성을 잃지 않으면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를 제한한다. 즉, 내적 자연과 외적 자연의 사회화의 범위, 곧 한계치를 설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사회체계는 조직원리를 변화시킨다. 한 사회체계의 조직원리가 변화하여 그 체계의 동질성을 잃어버리고 다른 조직 원리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과정을 ‘사회진화’라고 한다. 이러한 사회 진화를 통해 체계는 생활세계로부터 독립되고, 분리된다. 즉, 근대 이전 사회 구성원에 의해 통제 가능했던 체계가 사회진화에 의해 통제 불가능한 체계로 독립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 주원인은 생산력의 발달에 있다. 생산력이 극도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외적자연의 사회화과정'즉, 체계의 자율성 획득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이전의 사회통합을 이루어 왔던 생활세계의 규범은 파괴되고 동시에 체계는 생활세계를 침식하면서 넓은 행동공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과정은 사회통합의 위기를 일으키고, 그로 인해 문제해결능력이 떨어뜨린다. 즉, 체계가 분화되고 그 지배영역이 확장되면서, 체계는 더욱 복잡해지고 그로 인해 환경은 통제 불가능한 요소들이 더욱 많아져 사회에 위기를 낳는다. 환경에 있어서 통제 불가능한 요소가 더욱 많아진다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더 이상 체계에 타당성을 청구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인다는 것을 뜻하며 이는 생활세계를 축소화 시키고, 왜소화시킨다. 이를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라 한다.
이러한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현상은 특히 자본주의에서 가장 극대화된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조절하는 시장메커니즘이 생산력발달을 보장함으로써, 사회구성원들이 경제를 통제 불가능하게 하고 그로 인해 사회 통합의 위기를 발생시킨다. 하버마스는 체계의 확장은 사회 구성원의 합의가 아닌 강압에 의해 일어나는 사회 병리적 현상이며, 이로 인해 생활세계의 변형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의 확장 과정이 언어가 아닌 탈언어화된 매체인 '돈과 권력'에 의해 진행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문제점의 대안으로서, 하버마스는 규범 창출적 언어에서의 의사소통행위로 인해 타당성 청구에 의한 합의가 생활세계의 부활을 이끈다고 제안하고 있으며, 이는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정당화 시켜주는 것이다. 즉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은 체계의 자율성에 대항한 생활세계 속 인간 주체의 능동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적극적 역할을 통한 사회변화의 가능성을 낙관한다는 점에서 생활세계의 부활을 추동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의사소통적 이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인가? 하버마스는 여기서 ‘이상적 담화상황’이라는 개념을 정초한다.
V. 이상적 담화상황
이제 여기서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이란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 하버마스는 이상적 담화상황을 제시한다. 언어와 모든 담화에 선험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규칙체계는 담화가 이루어지는 실제적 문법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된다. 이 문법의 가장 간단한 도식은 “나는 - 무언가에 대해 - 상대방에게 - 말한다” 의 형태로 나타낼 수 있다. 이로부터 주체, 객체, 상호주관성, 담화행위 자체라는 네 가지 요소가 도출된다. 말하는 나는 주체이며, 말하는 내용은 객체, 대화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호주관성, 그리고 말하는 행위 그 자체는 담화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 네 요소로부터 담화가 타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4가지의 요구가 있다. 진실성, 진리성, 이해가능성, 규범적 정당성이 그것이다. 진실성은 말하는 내가 상대방을 기만하려 하지 않고 진실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고, 진리성은 말하는 내용이 객관적으로 옳아야 한다는 것, 이해가능성은 상대방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규범적 정당성은 담화 행위가 사회적 권리와 규범에 비추어 정당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4가지 요구가 전제될 때, 이상적인 담화상황이 가능하며 의사소통이 왜곡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위와 같은 이상적 담화상황이 전제될 때, 과연 체계의 확장을 제한하거나 제어할 수 있을까? 이론의 현실적인 적합성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하버마스가 체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체계가 자율적으로 획득한 메커니즘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 엉뚱하게 체계 바깥에서 해결하려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하버마스 입장에서 보면 여전히 도구적 이성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임상의학에 비유해보면 일반적으로 질병을 치유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병의 원인이 되는 것을 제거하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병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는 방법이 있다. 하버마스는 후자의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사회구조의 병리적 현상은 후자의 방법이 좀 더 안전한 편이다.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점진적 개혁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며 필연적으로 체계를 급진적으로 전복시킬 필요성을 낳는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값비싼 비용을 치러야 한다. 또한 원인제거를 통한 체계의 전복이 곧 생활세계의 부활로 이어진다고 말할 수도 없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문제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계급 지배로 보았다. 이것을 청산하려면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끝장내야 했고, 자본주의의 모순은 폭력혁명을 통해 계급구조를 해체함으로써 해결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정작 혁명은 사실상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끝낼 필요가 없었던, 자본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도 않았던 러시아에서 먼저 일어났다. 러시아는 19세기까지 농노제를 유지하였으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러 뒤늦게 산업화과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볼셰비키 혁명은 짜르 체제를 폐지한 1917년 2월 혁명 뒤 겨우 8개월 만에 다시 일어났다. 또한 중국의 공산화는 모택동의 공산당이 1949년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당시 중국에서 자본가와 도시 노동자의 갈등이 첨예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었다. 그 때까지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였던 중국에 자본주의 메커니즘의 문제점이 드러난다는 것은 사실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그런데,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스탈린주의로 퇴행하였고, 1949년의 중국 혁명은 문화대혁명으로 퇴행하였다. 체계를 전복시키면서 다른 체계 메커니즘이 생성되면서 생활세계의 부활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의 예언과 달리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그런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이 지니는 함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체계 메커니즘을 제대로 분석하는 것과 처방을 내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체계 메커니즘은 자율적 속성과 그 나름의 관성을 갖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예언한 것과 달리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은 민주적인 정치제도 내에서 의사소통 합리성을 증대시켰고, 그 결과 유럽 각국은 정부의 개입 (복지와 재정정책 등)으로 시장의 불완전성을 보완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하버마스가 이야기하는 의사소통적 이성은 적실성을 갖게 되는데, 유럽은 하버마스가 정초한 이상적 담화상황에 가장 근접한 공론장의 토대를 갖추었음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VI. 하버마스 철학의 의의
하버마스가 인식론적 객관주의를 비판한 대목은 오늘날 수학과 통계학을 이론적 도구로 삼는 현실 경제학에 대한 비판에 적실성을 갖는 데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현대 경제학의 가장 큰 성과로 평가받는 계량경제학이나 존 내쉬의 게임이론 내에서 인간은 하나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계량경제학에서 인간 개개인의 행위는 전혀 의미가 없으며 모든 것은 총량과 평균으로 분석되고 거기서 도출한 함수식에 따라 미래의 행동은 수학적으로 결정된다. 게임이론의 경우 상대와 나의 선택에 따른 각각의 순서쌍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의 매트릭스는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합리적인 선택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다. 특히, 경제학이나 정치학, 국제관계론에서 자주 인용되는 수인의 딜레마 게임 (Prisoner's Dilemma)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이 얼마나 요구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모델이다.
게다가 하버마스가 강조한 그러한 인식관심은 심지어 오늘날 자연과학에서조차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원자 속의 작은 입자는 객관적인 관찰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미세한 물리세계에서 뉴턴의 고전물리학의 패러다임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으며 그 안의 작은 소립자들은 관찰자의 관찰하는 행위 자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에서조차 물질에 대한 객관적 관찰 자체가 부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늘 실제의 현실이 아닌 몇 가지의 가정에서 출발해 모델을 만드는 현실 경제학이 인식론적 객관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결국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 가치중립적인 객관을 내세우면서 방법론적 과학의 옷을 입은 현실 경제학이 계층 간 빈부격차 문제는 전혀 해결해주고 있지 못한 상황은 과연 우연일까? 하버마스의 논의로 돌아가서 진단하면 경제학자들의 관심이 총량의 부를 증진시키는 데 있을 뿐, 사회구성원 전체의 균등한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실천적 관심’이 없기 때문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하버마스가 내놓는 의사소통적 이성은 오늘날의 사회 현실에서 아주 적합한 처방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먼저 첨예화된 갈등을 에너지 삼아 폭력혁명으로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했던 마르크스주의의 실패를 제대로 반성하는 의미를 띤다. 하버마스는 계급 간 대립이 아니라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상적 담화상황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간의 의사소통은 상대방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예컨대 자본주의가 내재적으로 갖는 체계 자율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이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본가까지 포함하는 인류전체에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공동의 인식이 가능해질 때, 그리고 그것에 대처하기 위한 대안을 합리적으로 논의할 때 체계의 확장속도를 제어하면서 그러한 모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 이상적 담화상황에 대한 강조는 좌우와 보혁 간의 소통이 전혀 안 되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더욱 적실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하버마스는 오늘날 많은 철학자들이 현실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대안을 찾지 못하고 비관주의로 빠져드는 것과 달리 보편적 이성을 의사소통적 이성의 개념으로 정초하면서 인간 주체의 능동적인 의지와 적극적 실천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을 주었다는 것, 인간에게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계몽에 대한 비판이 많은 사람들을 허무와 냉소로 인도하여 결과적으로 사회 변화를 전혀 담보하지 못하는 보수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비판에 직면하는 것과 비교할 때 더욱 그렇다. 하버마스는 근대 계몽의 기획의 시행착오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그 목표를 오늘날 새롭게 설정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의를 지닐 것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recuperate?Redirect=Log&logNo=70019409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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