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목적은 텍스트의 복수성을, 그 의미현상의 열림을 생각하고 상상하고 체험하는 데 있다.” - Roland Barthes

바르트의 텍스트 분석

바르트에게 있어 의미작용은 소쉬르의 기호학적인 개념으로 닫혀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구성된다. 그런데, 소쉬르는 언어에 대해 구조주의적인 사유를 하고 있었기에 그 의미작용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기호 안의 기의가 확정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일한 기의라고 해도 분명 사람마다 기호에 대해 갖게 되는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바르트는 의미와 구별되는 ‘가치’의 개념을 사용한다. ‘가치’의 개념은 의미를 기표와 연결된 기의로 보는 의미작용이 차이점을 드러내지 못하는 난점을 해결해준다. ‘가치’의 개념에서는 의미를 하나의 ‘즉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면서도 무한한 조합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이 ‘가치’의 개념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현상의 ‘열림’과 ‘복수성’을 상상하고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텍스트 분석은 이제 어떤 방식으로 구조가 잡혀있느냐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구조를 만들어내느냐를 관찰한다. 그렇다고 바르트가 구조분석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고정된 의미가 있는 대상은 ‘구조’를 관찰하여 그 의미작용의 체계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구조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바르트는 텍스트 분석을 통해 의미작용(signification)이 아닌 구축과 결합을 통해서 새롭게 의미가 생산되는 것을 관찰하고자 한 것이다. 바르트는 이를 의미현상(signifiance)이라 명명한다. 즉, 텍스트 안의 모든 것은 무엇인가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 의미의 합이 보다 궁극적인 구조나 더 큰 의미를 대변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합성의 오류’가 되고 만다. 결국, 텍스트는 열려 있고 그 조합은 무한하며 새로운 의미 생산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의 열림과 새로운 의미생성에 대한 전형적인 예로 윤동주의 시 ‘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우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야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위 시에는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별주부전의 내용과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내용이 혼합되어 있다. 시인은 시적 자아의 고귀한 품성이나 양심을 ‘간’으로 은유하면서 두 설화의 텍스트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내고 있는데, ‘토끼’의 경우 욕심이 많으면서도 잔꾀와 기지가 살아있는 원래 ‘별주부전’의 캐릭터에서 벗어나 습해지기 쉬운 ‘간’을 양지바른 곳에 말리면서 또한 소중히 다루는 모습을 나타내면서 프로메테우스와 중첩되어 시적 자아를 형상화하고 있다. 윤동주는 이 시에서 이미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의 열림과 그 복수성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의 죽음

바르트는 기표로서의 텍스트가 만드는 의미의 다양함을 드러내기 위해 이야기의 단위로 렉시(lexies)를 사용한다. 이는 체계적인 단위가 아니라 바르트가 임의로 사용한 읽기단위이다. 발자크의 단편소설 Sarrasine를 분석한 ‘S/Z'에서 바르트는 3개의 렉시에서 5개의 코드를 발견하고 그 코드들에 의한 느린 독서를 시행한다. 여기서의 코드는 텍스트를 읽는 하나의 프레임이자 그것을 사로잡는 그물인데, 코드가 5개로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바르트는 신약성경의 사도행전 10:1~3을 12개의 코드로 나누기도 한다.

바르트는 이런 방식으로 의미가 생성될 수 있는 모든 기표로부터 코드를 꺼내고자 한다. 이렇게 하여 개개의 렉시들은 텍스트가 전개되어 감에 따라 코드에 의해 서로 섞이고 겹쳐진다. 바르트에 의하면 각각의 코드는 텍스트에 담겨 있는 하나의 목소리에 불과한 반면, 텍스트는 단 하나의 목소리가 아닌 여러 소리가 합쳐진 ‘네트워크’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 주장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상호텍스트’라는 개념에서 비롯된 것인데, 하나의 텍스트는 항상 또다른 텍스트와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바르트 자신도 이미 1968년 후기 구조주의자로서 이론을 폈던 최초의 논문 ‘저자의 죽음’에서 비슷한 주장을 편 적이 있다. 이는 한 마디로 저자가 텍스트의 기원이라는 설을 부인한다. 텍스트는 항상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이전의 텍스트를 반영한 것이고 때로는 파생적 아이디어, 변종, 표절과 패러디를 통해 존재하는 것이지, 더 이상 작가의 오리지널한 저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작가는 코드를 발송하는 사람의 위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예는 무수히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사회계약론’에서 장 자크 루소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군주주권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밀하게 공화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는데, 이런 해석은 마키아벨리의 ‘로마사논고’의 텍스트와 비교하면서 얻어진 결론이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프로이트는 인간의 금기된 성적 욕망의 표현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똑같은 텍스트에서 르네 지라르는 다른 신화와의 비교를 통해 모든 신화에 내재된 희생양 제의를 발견, 무고한 1인에 대한 만인의 집단적 폭력을 통해 사회가 질서를 회복한다는 논의를 전개하면서 신화는 그 무고한 1인이 희생될만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렇듯, 하나의 텍스트는 다양한 코드를 통해서 또 다른 텍스트와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새로운 의미를 구축하고 생성하게 되고 독자 또는 수용자는 이제 텍스트를 능동적으로 독해하며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자기의 처지와 구미에 맞게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게 된다.

텍스트와 쾌락, 이데올로기에서 무의미로

이후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쾌락(pleasure)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 하나는 황홀경이나 희열(jouissance)로서 굳이 성적으로 표현하면 오르가즘과 비슷한 개념이다. 다른 하나는 희열보다 다소 약한 개념으로 평범한 ‘재미’(fun)를 말한다. 이 두 가지의 차이는 텍스트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바르트는 텍스트를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writerly text)와 읽혀질 수 있는 텍스트(readerly text) 두 가지로 구분한다.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는 독자가 자신의 입장에 맞게 해석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끔 열려 있는 텍스트를 의미한다. 영화로 예를 들자면 미장센을 중시하면서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롱테이크로 화면을 처리하는 약간 지루하고 느린 영화가 있다. 이런 영화는 관객이 자율적으로 화면 어딘가를 응시할 수 있으며 화면에 담겨진 주변적인 풍경과 소품들을 음미할 수 있게 된다. 주로 유럽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고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도 그런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한편, 읽혀질 수 있는 텍스트는 독자가 한 가지 지배적인 의미로만 읽기를 강요당하는 닫혀 있는 텍스트이다. 화면전환이 빠르고 카메라가 자주 움직이는 그런 영화들, 대표적으로 헐리웃 액션영화가 이런 문법을 따르고 있는데, 이런 영화들은 관객이 말 그대로 카메라의 흐름을 따라서 다시 말하면 감독이 인도하는 그대로 시선을 옮기면서 수동적으로 재미를 느끼게 된다.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 등의 문학에서도 이런 작품들이 등장한다.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로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이나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의 부조리극,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회화 등을 추가로 예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바르트에 의하면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가 희열을 준다면 읽혀질 수 있는 텍스트는 평범한 재미를 주는 것에 그치고 만다. 당연히 바르트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이며, 어떤 텍스트든지 궁극적으로는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씌어질 수 있는 텍스트는 대부분 지루하고 난해하며 때로는 무의미에 가깝다. 결국 바르트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의미이다. 읽혀질 수 있는 텍스트도 메타적으로 읽히면 그 신화의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게 되는데, 다시 그것은 궁극적으로 무의미로 회귀한다. 다시 말하면 무의미란 단순히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마저 근본적으로 의미를 박탈당하고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바르트는 이를 통해 신화론의 ‘이데올로기’에서 ‘무의미’로 한 발 더 나아간 셈이다.

그렇다면, 왜 무의미인가? 바르트는 세상의 모든 의미들은 인간을 억압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텍스트에서 의미를 박탈하여 억압의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쾌락적 유희에 이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는 68혁명으로부터 온 환멸감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를 뒤흔들었던 68혁명은 다양한 의제들을 분출시켰지만 수렴되지 않는, 즉 발산해버리는 반항의 에너지는 결국 혼란과 무기력으로 빠져들고 만 것이다. 여기서 오는 환멸감으로 인해 거대 정치담론마저 결국 하나의 신화로, 이데올로기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사회의 신념체계를 떠받드는 언어의 구조를 불신하면서 그 모든 텍스트에서 의미를 박탈하고자 했던 것이다.

바르트의 한계와 의의

바르트가 후기 텍스트 분석을 통해 무의미로 나아간 것은 왠지 필연적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초기에 바르트는 ‘신화론’에서 이미지의 기표와 기의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 2차적인 기의를 찾고 그것이 어떻게 신화로 기능한지를 분석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바르트 스스로도 인정하다시피, 신화를 파헤친 그 신화분석가의 견해마저도 또 하나의 신화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신화의 이데올로기를 밝혀내는 작업마저 다시 신화가 되어버리는 것, 그것이 첫 번째 한계이다. 따라서 바르트가 결국 그 신화의 이데올로기에서 텍스트의 무의미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바르트의 ‘무의미’는 사회학적으로 적용할 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이런 무의미는 궁극적으로 포스트모던의 특징이다. 의미의 박탈, 개인의 해방이 과연 무엇을 담보하는가, 다시 상투적인 비판으로 돌아오면 결국 대안은 없게 된다. 바르트를 넘어 포스트모던 일반으로 넘어가게 되면 이들의 논의는 거칠게 말해 ‘머리가 아프니까 목을 자르자’는 식의 이야기로 들린다. 텍스트에서 의미를 박탈하여 모든 거대 담론들을 불신하고 부정하는 행위가 왠지 성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이성과 교제하다가 몇 번의 실패와 상처를 거듭했다고 모든 이성을 불신하며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는 사람처럼 약간 애처롭다. 기득권에 대한 대항담론이 문제를 드러내면 다시 변증법적으로 발전된 새로운 담론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닫혀진 텍스트를 유연하게 열린 텍스트의 성질로 바꾸면서 교조성을 지양하면서 보다 민주적인 담론으로 새롭게 의미를 생산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기에 차라리 하버마스가 민주적 의사소통의 공론장을 만들자는 대안이 차라리 보다 더 설득적으로 들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바르트의 의의는 있다. 그는 소쉬르의 기호학적 방법론으로 ‘언어’를 넘어 잡지의 이미지, 패션잡지의 모드, 문학작품과 텍스트 등 기호연구의 범위를 확장하여 탐구하였다. 또한 그는 사회를 해석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가들의 이론을 접목시켜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키고 대중이 읽기 쉽게 글을 썼던 몇 안 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모든 언어와 이미지와 이야기들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움이 궁극적으로 신화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무엇이든 보이는 그대로 믿지 말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즉, 바르트는 새로운 인식론의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신화적 자연스러움을 폭로하고 이데올로기를 비판한 바르트는 자신의 분석마저 하나의 신화이자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결국 수용자 개개인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독해가 중요함을 역설하였던 인식론의 민주주의를 개척한 사람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방향이 결국 허무주의와 도착적 쾌락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이 한계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recuperate/70019473811

by 아이파크 2007. 10. 30. 13:01

위르겐 하버마스 

의사소통적 이성을 통한 계몽의 현대적 기획

I. 계몽의 위기와 ‘계몽의 변증법’의 한계


근대 계몽주의는 진보에 대한 무한한 믿음과 이를 통한 인간해방이라는 위대한 이상을 인류에게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을 실현케 해준다고 믿었던 것은 인간의 이성이었다. 계몽주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포가 인간의 무지로부터 비롯되었고, 그것이 종교적 세계관을 낳았다고 보았다. 이성과 합리적 사고는 이러한 인간을 무지로부터 해방시킴과 동시에 더 이상 자연을 공포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막스 베버는 근대의 이러한 합리화과정을 탈마법화과정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이성에 대한 과신은 문명을 발전시켰지만 그와 동시에 문명의 위기를 낳았다. 합리성으로 무장한 근대의 3가지 요소, 즉,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경제학, 그리고 관료적 행정시스템은 환경파괴와 핵전쟁에 대한 공포, 물질만능주의와 인간소외의 문제를 낳았던 것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러 서구의 사상가들은 바로 이러한 문명의 위기를 지각하고 있었다. 특히, 20세기 전반기의 프랑크푸르트학파로 대표되는 비판이론가들은 계몽의 본래 의도와 그것이 가져온 결과 사이의 커다란 괴리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려고 하였는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그 대표적인 저서이다.


‘계몽의 변증법’은 수학적 논리로 자연과 인간의 모든 것을 획일화하고 도구화하는 ‘도구적 이성’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이는 자연과 인간이 지니는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망각하게 하였고, 그 결과 나타난 것이 현대세계의 총체적 소외이며, 20세기의 전체주의적 국가체제의 출현은 그러한 소외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계몽의 변증법’은 음울한 시대를 해석하고 진단할 뿐, 그것을 극복할 적절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했다.

II. 인식론적 객관주의에 대한 비판


하버마스는 1968년 ‘인식과 관심’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아도르노 진영과 포퍼 진영 사이의 ‘실증주의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결론적으로 순수한 객관적 인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인식에는 이것을 인도하는 이해관계와 관심이 동반된다고 주장하여 아도르노와 입장을 같이 하였다.


하버마스는 현실과 관련된 다양한 인식관심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그것은 ‘기술적인 인식관심’과 ‘실천적인 관심’이다. 기술적인 인식관심은 경험적이고 분석적인 학문, 즉 자연과학에 있어서 지배적이며 실천적인 관심은 역사학, 해석학적인 학문, 즉 정신과학에 있어서 지배적이다. 그리고 자연과 사회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해결해 내려는 노력이 우리를 학문연구로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현실적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식은 없을 수 없다고 보았다. 즉, 문제해결을 위한 실천적 관심의 차원에서 하버마스가 보는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사회적 실천가능성, 그것도 인간의 능동적인 역할에 의한 실천가능성을 담보하여 해방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버마스가 두 사람의 칼(Karl), 즉 Karl Marx와 Karl Popper를 비판하는 부분에서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하버마스는 사회현상을 가치판단의 개입 없이 과학적인 분석을 시도하고자 하는 포퍼의 실증주의나 하부구조에 의한 경제결정론에 집착하는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인간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능력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된 해방의 가능성을 열어주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이러한 비판적 성찰을 보여주는 학문적 모델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발견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치료, 즉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이 의사의 일방적인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사는 환자와의 대화를 통해 환자가 근본적인 자기성찰에 이르도록 이끌 뿐이며 따라서 치료를 위해서는 환자 자신의 능동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 게다가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러한 자기성찰을 환자뿐만 아니라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에게도 요구한다. 정신분석학은 이처럼 해방이 인간주체의 자기성찰과 능동적 실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에게 중요성을 지닌다. 그와 동시에 하버마스는 정신분석학이 성찰과 실천의 차원에서 이탈하여 인간의 심리적 발전과정을 객관주의적 이론으로 정립하려 하는 시도는 단호히 비판한다. 즉, 그러한 시도는 인간을 자연과학적 법칙성에 종속시키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의 심리를 유년기의 성적 체험의 고착, 즉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설명하려는 프로이트의 시도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마르크스 비판도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된다. 즉, 마르크스는 사적 유물론을 통해 하부구조가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처럼 파악하여 인간주체의 능력이 지니는 가능성을 성찰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인식론적 객관주의는 인간을 과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하나의 대상으로만 파악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율적이며 능동적인 면을 무시하고 억압과 폭력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III. 의사소통적 이성


아도르노의 한계는 이성 중심의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대체할 다른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 이성을 도구적 이성으로만 파악한 데에서 기인한다. 보편적 이성을 오로지 도구적 이성으로만 파악하는 사유가 해방을 위한 공동의 사회적 실천 가능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공동의 선을 위한 공동의 실천은 어쨌든 보편적 이성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이러한 이성을 언어의 상호주관성에서 발견하여 아도르노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다.


하버마스 입장에서는 ‘도구적 이성’을 비판하고 있는 사유 또한 이성적 사유이다. 그것은 도구적 이성을 넘어선 이성으로서 하버마스는 이것을 의사소통적 이성으로 파악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도구적 이성의 주관적 폐쇄성과 획일성, 그리고 폭력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개방적이고 상호적인 이성이 확보되면 민주적 종합, 다시 말해 비폭력적 보편성도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의사소통적 이성을 통해 본래 계몽이 꿈꾸었던 기획, 즉 인류의 진보와 공동선의 미래에 대한 실현도 다시 가능해진다. 이런 측면에서 하버마스의 철학은 진보적 낙관주의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그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앞 절에서 우리는 하버마스가 인식론적 객관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하버마스는 인식을 구성하는 관심과 그에 상응하는 영역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형식으로 분류한다.

∘실증주의적인 인식관심 - 물질적 생산과 교환의 경제적 영역
∘신비주의적인 인식관심 - 상징적 상호작용과 관련된 의사소통의 영역
∘비판적∙해방적 인식관심 - 인간사회의 권력 및 지배관계의 영역

하버마스에 따르면 각각의 인식관심 영역은 고유성을 지니며 이들을 포괄할 수 있는 단일한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마르크스가 토대가 상부구조까지도 결정한다고 본 것과 달리 하버마스는 상부구조 역시 그 나름의 자율적인 기능과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경제적 생산력으로서의 노동과 상호작용을 구분하고 이 양자 사이의 관계가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상호작용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반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하버마스는 노동과 상호작용을 엄격히 구분하여 노동을 도구적 행위로, 상호작용을 의사소통적 행위로 구분하면서, 현대사회의 문제는 도구적 이성의 만연에 의해 물질적 영역이 의사소통의 의미 영역인 상징적 상호작용의 영역을 과도하게 침범하고 훼손한 데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도구적 이성의 일면적 강조에 의해 의사소통의 상호성과 의미가 체계적으로 왜곡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기서 하버마스의 논의는 마르크스와  차이점을 갖게 된다. 마르크스는 복잡한 사회의 문제를 단순화시켜 온 관심을 하부구조의 영역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자본가들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노동의 소외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이 되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끝장내야 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적인 혁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반면 하버마스에 따르면 하부구조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 사회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물질적 생산과 교환의 영역 이외의 영역을 고려하지 않은 도구적 이성 중심의 단순한 해법은 또 다른 모순을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구적 이성에 의해 왜곡된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사회적 모순의 해결은 그 사회가 어느 정도로 그것을 공론화하여 지양할 수 있는 가에 달려 있으며 참된 진보의 척도는 사회구성원들이 그에 대한 장애요소를 함께 인식하고 자율적 합의를 통해 그것을 공동으로 제거해 나가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신분석 치료자가 환자와 의사소통을 통해 질병을 치료해나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IV. 체계와 생활세계


하버마스의 논의를 보다 쉽고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하버마스 자신이 내세운 ‘체계’와 ‘생활세계’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 절에서 하버마스는 인식관심의 영역을 세 가지로 나누었는데, 하버마스는 이를 기반으로 해서 사회구성체를 체계와 생활세계로 구분하였다. 생활세계는 '언어'와 '행위'의 주체로서 인간들이 합리적 토론을 통해 진리를 상호 검증할 수 있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가능한 세계로서 인간 행위와 경험이 갖는 의미를 공유하는 영역이다. 반면, 체계는 간단히 말하면 물질적 자원의 생산과 교환의 영역으로 마르크스의 ‘토대’개념과 유사하다. 하지만 체계는 경제적 하부구조의 의미만이 아니라 상부구조의 정치와 행정의 영역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토대와는 약간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근대 이전에는 체계는 사회구성원들에 의해 통제 가능했으며 따라서 사회는 평온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하나의 체계로서, 사회체계를 살펴보면, 사회체계는 사회구성원(내적자연)과 자연자원(외적자연)으로 이루어지는데 사회구성원은 말 그대로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자연 자원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적 자원을 말한다.


여기서 사회적 환경과의 교류에서 사회구성원들이 사회화되는 것을 내적자연의 사회화라고 하고 (ex. 가정, 학교, 법, 문화) 사회체계가 필요로 하는 물적 자원이 외적자연으로부터 공급되는 것을 외적자연의 사회화라 한다. (ex. 의복, 음식, 집, 화폐) 그런데, 여기서 외적자연의 사회화는 "조직원리"에 따라 운영된다. 조직원리란 조직은 운영하는 방식, 사회를 운영하는 방식 (ex. 법 ; 신호등이 파란 불일 때 길을 건널 수 있다)이다.  이러한 조직원리는 한 사회가 그 사회의 동질성을 잃지 않으면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를 제한한다. 즉, 내적 자연과 외적 자연의 사회화의 범위, 곧 한계치를 설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사회체계는 조직원리를 변화시킨다. 한 사회체계의 조직원리가 변화하여 그 체계의 동질성을 잃어버리고 다른 조직 원리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과정을 ‘사회진화’라고 한다. 이러한 사회 진화를 통해 체계는 생활세계로부터 독립되고, 분리된다. 즉, 근대 이전 사회 구성원에 의해 통제 가능했던 체계가 사회진화에 의해 통제 불가능한 체계로 독립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 주원인은 생산력의 발달에 있다. 생산력이 극도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외적자연의 사회화과정'즉, 체계의 자율성 획득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이전의 사회통합을 이루어 왔던 생활세계의 규범은 파괴되고 동시에 체계는 생활세계를 침식하면서 넓은 행동공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과정은 사회통합의 위기를 일으키고, 그로 인해 문제해결능력이 떨어뜨린다. 즉, 체계가 분화되고 그 지배영역이 확장되면서, 체계는 더욱 복잡해지고 그로 인해 환경은 통제 불가능한 요소들이 더욱 많아져 사회에 위기를 낳는다. 환경에 있어서 통제 불가능한 요소가 더욱 많아진다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더 이상 체계에 타당성을 청구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인다는 것을 뜻하며 이는 생활세계를 축소화 시키고, 왜소화시킨다. 이를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라 한다.


이러한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현상은 특히 자본주의에서 가장 극대화된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조절하는 시장메커니즘이 생산력발달을 보장함으로써, 사회구성원들이 경제를 통제 불가능하게 하고 그로 인해 사회 통합의 위기를 발생시킨다. 하버마스는 체계의 확장은 사회 구성원의 합의가 아닌 강압에 의해 일어나는 사회 병리적 현상이며, 이로 인해 생활세계의 변형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의 확장 과정이 언어가 아닌 탈언어화된 매체인 '돈과 권력'에 의해 진행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문제점의 대안으로서, 하버마스는 규범 창출적 언어에서의 의사소통행위로 인해 타당성 청구에 의한 합의가 생활세계의 부활을 이끈다고 제안하고 있으며, 이는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정당화 시켜주는 것이다. 즉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은 체계의 자율성에 대항한 생활세계 속 인간 주체의 능동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적극적 역할을 통한 사회변화의 가능성을 낙관한다는 점에서 생활세계의 부활을 추동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의사소통적 이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인가? 하버마스는 여기서 ‘이상적 담화상황’이라는 개념을 정초한다. 

V. 이상적 담화상황


이제 여기서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이란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 하버마스는 이상적 담화상황을 제시한다. 언어와 모든 담화에 선험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규칙체계는 담화가 이루어지는 실제적 문법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된다. 이 문법의 가장 간단한 도식은 “나는 - 무언가에 대해 - 상대방에게 - 말한다” 의 형태로 나타낼 수 있다. 이로부터 주체, 객체, 상호주관성, 담화행위 자체라는 네 가지 요소가 도출된다. 말하는 나는 주체이며, 말하는 내용은 객체, 대화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호주관성, 그리고 말하는 행위 그 자체는 담화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 네 요소로부터 담화가 타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4가지의 요구가 있다. 진실성, 진리성, 이해가능성, 규범적 정당성이 그것이다. 진실성은 말하는 내가 상대방을 기만하려 하지 않고 진실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고, 진리성은 말하는 내용이 객관적으로 옳아야 한다는 것, 이해가능성은 상대방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규범적 정당성은 담화 행위가 사회적 권리와 규범에 비추어 정당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4가지 요구가 전제될 때, 이상적인 담화상황이 가능하며 의사소통이 왜곡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위와 같은 이상적 담화상황이 전제될 때, 과연 체계의 확장을 제한하거나 제어할 수 있을까? 이론의 현실적인 적합성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하버마스가 체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체계가 자율적으로 획득한 메커니즘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 엉뚱하게 체계 바깥에서 해결하려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하버마스 입장에서 보면 여전히 도구적 이성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임상의학에 비유해보면 일반적으로 질병을 치유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병의 원인이 되는 것을 제거하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병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는 방법이 있다. 하버마스는 후자의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사회구조의 병리적 현상은 후자의 방법이 좀 더 안전한 편이다.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점진적 개혁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며 필연적으로 체계를 급진적으로 전복시킬 필요성을 낳는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값비싼 비용을 치러야 한다. 또한 원인제거를 통한 체계의 전복이 곧 생활세계의 부활로 이어진다고 말할 수도 없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문제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계급 지배로 보았다. 이것을 청산하려면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끝장내야 했고, 자본주의의 모순은 폭력혁명을 통해 계급구조를 해체함으로써 해결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정작 혁명은 사실상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끝낼 필요가 없었던, 자본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도 않았던 러시아에서 먼저 일어났다. 러시아는 19세기까지 농노제를 유지하였으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러 뒤늦게 산업화과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볼셰비키 혁명은 짜르 체제를 폐지한 1917년 2월 혁명 뒤 겨우 8개월 만에 다시 일어났다. 또한 중국의 공산화는 모택동의 공산당이 1949년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당시 중국에서 자본가와 도시 노동자의 갈등이 첨예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었다. 그 때까지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였던 중국에 자본주의 메커니즘의 문제점이 드러난다는 것은 사실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그런데,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스탈린주의로 퇴행하였고, 1949년의 중국 혁명은 문화대혁명으로 퇴행하였다. 체계를 전복시키면서 다른 체계 메커니즘이 생성되면서 생활세계의 부활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의 예언과 달리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그런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이 지니는 함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체계 메커니즘을 제대로 분석하는 것과 처방을 내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체계 메커니즘은 자율적 속성과 그 나름의 관성을 갖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예언한 것과 달리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은 민주적인 정치제도 내에서 의사소통 합리성을 증대시켰고, 그 결과 유럽 각국은 정부의 개입 (복지와 재정정책 등)으로 시장의 불완전성을 보완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하버마스가 이야기하는 의사소통적 이성은 적실성을 갖게 되는데, 유럽은 하버마스가 정초한 이상적 담화상황에 가장 근접한 공론장의 토대를 갖추었음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VI. 하버마스 철학의 의의

하버마스가 인식론적 객관주의를 비판한 대목은 오늘날 수학과 통계학을 이론적 도구로 삼는 현실 경제학에 대한 비판에 적실성을 갖는 데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현대 경제학의 가장 큰 성과로 평가받는 계량경제학이나 존 내쉬의 게임이론 내에서 인간은 하나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계량경제학에서 인간 개개인의 행위는 전혀 의미가 없으며 모든 것은 총량과 평균으로 분석되고 거기서 도출한 함수식에 따라 미래의 행동은 수학적으로 결정된다. 게임이론의 경우 상대와 나의 선택에 따른 각각의 순서쌍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의 매트릭스는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합리적인 선택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다. 특히, 경제학이나 정치학, 국제관계론에서 자주 인용되는 수인의 딜레마 게임 (Prisoner's Dilemma)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이 얼마나 요구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모델이다.


게다가 하버마스가 강조한 그러한 인식관심은 심지어 오늘날 자연과학에서조차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원자 속의 작은 입자는 객관적인 관찰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미세한 물리세계에서 뉴턴의 고전물리학의 패러다임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으며 그 안의 작은 소립자들은 관찰자의 관찰하는 행위 자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에서조차 물질에 대한 객관적 관찰 자체가 부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늘 실제의 현실이 아닌 몇 가지의 가정에서 출발해 모델을 만드는 현실 경제학이 인식론적 객관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결국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 가치중립적인 객관을 내세우면서 방법론적 과학의 옷을 입은 현실 경제학이 계층 간 빈부격차 문제는 전혀 해결해주고 있지 못한 상황은 과연 우연일까? 하버마스의 논의로 돌아가서 진단하면 경제학자들의 관심이 총량의 부를 증진시키는 데 있을 뿐, 사회구성원 전체의 균등한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실천적 관심’이 없기 때문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하버마스가 내놓는 의사소통적 이성은 오늘날의 사회 현실에서 아주 적합한 처방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먼저 첨예화된 갈등을 에너지 삼아 폭력혁명으로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했던 마르크스주의의 실패를 제대로 반성하는 의미를 띤다. 하버마스는 계급 간 대립이 아니라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상적 담화상황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간의 의사소통은 상대방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예컨대 자본주의가 내재적으로 갖는 체계 자율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이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본가까지 포함하는 인류전체에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공동의 인식이 가능해질 때, 그리고 그것에 대처하기 위한 대안을 합리적으로 논의할 때 체계의 확장속도를 제어하면서 그러한 모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 이상적 담화상황에 대한 강조는 좌우와 보혁 간의 소통이 전혀 안 되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더욱 적실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하버마스는 오늘날 많은 철학자들이 현실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대안을 찾지 못하고 비관주의로 빠져드는 것과 달리 보편적 이성을 의사소통적 이성의 개념으로 정초하면서 인간 주체의 능동적인 의지와 적극적 실천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을 주었다는 것, 인간에게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계몽에 대한 비판이 많은 사람들을 허무와 냉소로 인도하여 결과적으로 사회 변화를 전혀 담보하지 못하는 보수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비판에 직면하는 것과 비교할 때 더욱 그렇다. 하버마스는 근대 계몽의 기획의 시행착오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그 목표를 오늘날 새롭게 설정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의를 지닐 것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recuperate?Redirect=Log&logNo=70019409912

by 아이파크 2007. 10. 30. 12:59
처음으로 입사시험을 보았다.

한국방송공사 전국권 티브이 프로듀서직

무척 재미있었으나 재미있어하는 사람을 뽑아주는건 아닐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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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장 - 중앙대


뭐, 저건 별거 아니고 전날밤은 오랜만에 ㄱㄱㄱ 방에서 잤다. 내가 도착했을 땐 깨끗한 방에 누군가 머리만 내놓고 자다가 이쪽을 물끄러미 보는 통에 방을 잘못 찾은 줄 알 지경이었으나 그것은 오동이었다. 곧 ㄱㄱㄱ이 영희씨와 등장했다. 영희씨가 퇴장하고 오동이 본격적으로 깰 무렵 ㄱㄱㄱ의 어머님께서 ㄱㅎㄱ 형의 산타페를 타고 갑작스레 등장하셨다! (통영에서? 인천에서?) 여튼 덕분에 이것저것 먹고 잠들었다가 용돈도 받았다.ㄲㄲ

오랜만에 앙도 봤는데 안보다 보니 반갑더라.

뭐, 문제라면 내일도 시험이라는 것이지. 공부는 전혀 안되어있건만. 
by 아이파크 2007. 10. 28. 14:16
오늘은 할머니 기일이다.

다행히 학교 수업도 없었고 운전면호도 있기에 처음으로 장거리 운행에 나섰다. 목표는 해남이니 부산에서 해남까지 국토 횡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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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모님 묘소에서 할머니의 고향을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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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할아버지댁 소


저녁에 야간운전하다가 잠들뻔 했다. 다행히 바로 아버지와 교대해서 살았다.
by 아이파크 2007. 10. 18. 12:34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종일 운전해야 하는 긴장되는 날이었다.

시험치러온 세이슈를 만나 시험장에 데려다 주면서 소프트 버튼을 받았다.

동의의료원에는 여유있게 갔다.

해운대로 가는 길은 네비게이션이 있어도 초행의 압박에 행락객들의 압박을 느꼈다.

힘들게 싼 주차장을 찾아 3000원에 주차했다. 근데 호텔 주차장은 무료였다...

니콘 포토 스쿨 강좌로 김홍희의 강의를 들었다. 사은품도 맘에 들었다. D3는 왠지 아름다워 보였다.

학교로 가는 길은 더욱 힘들었다. 점심도 못먹고 전소 아래 어렵사리 주차를 하고 호구를 들고 낑낑거리며 가서는 즐거이 운동을 했지만 4달 쉬었을 뿐인데 내몸이 내몸 같지 않아서 실망과 한숨과 아쉬움 뿐인 운동이었다. 그 결과 사족에 모두 문제가 있었다. 2군데 물집하며 근육통하며...

이틀에 걸친 동아리 행사는 회장단의 실책을 낱낱이 드러냈다.

현재 회장 우는 나랑 닮은 점이 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ㅋ

1기 선배님들이 3분 오셨는데 설마 3차 노래방에서 03시가 넘도록 노실 줄은 몰랐다. (천하의 내가 마이크 한번 잡아 볼 수 없었다)

선배들끼리 한잔하러 간후 나는 애써 후배들도 내보내고 몇몇 심복(?)들과 함께 손가락만 빨던 한을 풀었다.

05시즘 중석 방에서 취침
모기에게 9방 물리고 7마리 사살후 더 견디지 못하고 07시경 운전해서 집으로

12시경 나는 지검인들이 40명 가까이 모인 결혼식장에 있었다. 장비가 빵빵한 진사들이 있어서 나는 깨작거리며 후배들이나 몇장 찍고 말았다.

고깃집은 맛있었으나 연기가 너무 심해 나는 눈물을 쏟고 콧물도 쏟았다.

후반은 11기 석 선배와 학교 앞에서 즐겼다. 그러나 이틀간 행보로 이미 몸이 ㄷㄷㄷ 집에서 잠든건 9시 경이었다.
by 아이파크 2007. 10. 14. 12:45
김홍희
저서 : 나는 사진이다 등
사진집단 일우

강의 내용 중 기억 나는 것은 독서를 통해 시야를 키우라는 것과 셔터를 누를 때 손가락의 움직임이 보여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떨림의 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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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콘의 기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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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강의실

by 아이파크 2007. 10. 13.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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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토, 에바, 레이 중 하나를 짤방으로 찍으려고 했는데 정작 찍은건 찌질한 신지...


영화제 폐막작으로 에바 극장판이 걸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흥분했다.

' 대한민국의 오천 오덕들이 한자리에 모일 것인가! '

오덕이 오천명이나 한자리에 모인다는 상상은 누구라도 전율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직접 그 가운데 끼여서 그들의 가공할 위력을 느끼고 싶기도 했지만 보통 사람인 나로서는 좀 두렵기도 하고 돈만원이 아깝기도 해서 상상만 하던 차였는데

에스페란사를 만나면 충동은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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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에 충실한 남자


우리는 카메라를 둘러메고 어림짐작으로 행사장을 찾아갔다. 어림짐작한 결과 우리가 도착 한 곳은 스크린 무대 뒤쪽의 관계자 공간이었다.
그래서 어쩌다보니 어영부영 관계자들과 움직이게 되었는데...
입장권도없고돈도없고 이래저래 하다보니 우리는 프레스 센터 옆 좌석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물까지 제공되는 특등석이었다. 껄껄.

예상과 달리 오천 오덕은 원천적으로 모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관객석의 1/4 정도는 관계자와 내빈석으로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수많은 연인과 영화팬들이 덕후의 점거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지한 셈이 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내 주변 사람들은 두음절로 영화를 평가했다.

'뭐야?'

덕후들은 기립박수로 화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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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쪽은 내빈석, 뒤쪽의 오른편에 오덕들이 모여서 자릴 떠날 줄 모르고 박수를 치고 있다.


낄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내빈들을 보며 인터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자리에서 레이의 브로마이드를 들고 기념 촬영하는 덕후에게도 마찬가지...

뭐, 그건 어째꺼나 폐막 파티는 아사히 맥주가 '락 타이거즈'라는 밴드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안주는 꼬깔콘! 신나게 놀았다. 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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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손엔 맥주 한손엔 꼬깔콘

by 아이파크 2007. 10. 12. 12:21
by 아이파크 2007. 10. 6. 19:32

행복

고대 그리스 스토아 학파에서는 행복에 대한 간단한 공식을 만들었다.

행복 = 달성 / 욕망

즉 행복치를 증가하기 위해서는
달성치를 높이거나 욕망치를 낮추면 된다.

달성치를 높이고자 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욕망치를 낮추는 방법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물론 중국의 철학자들을 통해서도 꾸준히 추천되어 왔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대라는 것은 흔히 알려진 사실이나 이는 수행을 통해  조절이 가능함을 심지어 마이너스로 만들 수도 있음을 많은 성인들이 보여주었다.

현재 서점에 나온 책을 보면 욕망을 낮추는 법보다 달성을 높이는 법에 대한 책(자기계발서)이 훨씬 많다. 우리 시대에 달성(=성취)의 증가를 욕망의 감소보다 중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분석했다.

욕망은 인간의 내적으로 수렴하고 성취는 외적으로 수렴한다. 즉 성취는 자신뿐만 아니라 세계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는 발명과 발견이다. 이는 개인의 영광일 뿐만아니라 세계 문명의 발길이다. 또 다른 예는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지위의 획득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즉, 나의 성취는 '인류에게 위대한 한 걸음' 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처음 언급한 바와 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경우 세상을 더럽힐 뿐인 것이다.  
by 아이파크 2007. 10. 6. 14:40

이 사람들이 법 이야기를 하니 지금 법학을 공부하는 내가 좀 더 설명하겠네.

이건 마치 무임승차 적발시 징역이 아니라 과징금을 먹이는 것과 비슷한거라네.돈의 크기만 차이가 있을뿐 죄질은 동일하다고 보는게 옳다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법(미국등은 안그렇단 소리라네)은 죄질을 달리 규정하고 처벌을 달리하기에 이는 법 내부 논리를 흐뜨러트리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

평등적용의 문제라면야 먼저 이야기 했듯이 그렇다면 무임승차도 징역 살아야한다네. 반대로 말하자면 다른 경제범들도 똑같이 적용하면 되는거구말이야.

전두환의 경우는 추징금을 못내고 있는데 기간내에 못 갚으면 당연히 징역이네. 징역이란 구금과 달리 복무 중에 역(노동)이 부과되는 형벌임을 덧붙이네.

마지막으로 유전무죄,무전유죄의 가장 단편적인 예는 우리나라특유의 제도인 '합의' 제도라네. 폭행과 같은 형사상의 범죄도 '합의'가 가능하고 합의란 대체로 경제적 보상인 고로 유전무죄란 말이 나온거지. 하지만 이 역시 반대로 보면 피해자가 돈을 원해서 그런 것일뿐 합의 안하면 징역이네.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든것은 위정자뿐만이 아니라 피해자 자신임을 잊어선 안되.

by 아이파크 2007. 10. 3. 23:14
에? 82점일줄 알았더니 72점이네? (합격 70점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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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파크 2007. 10. 1. 10:28

공부하러 갔다.

어째서 나는 공부하러 가야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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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휴일의 도서관


잠을 잤다. 아마 잘 수 밖에 없었을 거다. 그리고 원치 않게 자청한 번역을 했다. 나는 원치않는데 자청한 이유가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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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 혹은 파멸시키는 자


황령산...낮고 낮은 산이지만 밝다는 만월의 밤이지만 ...
어째서 우리는 휴대폰 후레쉬에 의지해서 우뚝 솟은 불상과 붕긋한 무덤을 지나며 산을 올랐을까.

길도 모르는 산을 어둠 속을 헤쳐 올라갔다. 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은 보름달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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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빛 혹은 파멸로 이끄는 빛


우리는 탑을 향해 어둠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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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진을 얻었다.

012

달밤의 산악행군 끝에 잘 닦인 도로를 만난건 잊어버리자. 열받아서 다시 하산 후 자가용으로 그 장소를 재방문 한 것도.
by 아이파크 2007. 9. 25. 11:11
1 If I speak in the tongues of men and of angels, but have not love, I am only a resounding gong or a clanging cymbal.

2 If I have the gift of prophecy and can fathom all mysteries and all knowledge, and if I have a faith that can move mountains, but have not love, I am nothing.

3 If I give all I possess to the poor and surrender my body to the flames, but have not love, I gain nothing.

4 Love is patient, love is kind. It does not envy, it does not boast, it is not proud.

5 It is not rude, it is not self-seeking, it is not easily angered, it keeps no record of wrongs.

6 Love does not delight in evil but rejoices with the truth.

7 It always protects, always trusts, always hopes, always perseveres.

8 Love never fails. But where there are prophecies, they will cease; where there are tongues, they will be stilled; where there is knowledge, it will pass away.

9 For we know in part and we prophesy in part,

10 but when perfection comes, the imperfect disappears.

11 When I was a child, I talked like a child, I thought like a child, I reasoned like a child. When I became a man, I put childish ways behind me.

12 Now we see but a poor reflection as in a mirror; then we shall see face to face. Now I know in part; then I shall know fully, even as I am fully known.

13 And now these three remain: faith, hope and lov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by 아이파크 2007. 9. 23. 15:45

학교 게시판에 붙은 광고지를 보고 알게되었는데

오늘 등교일이 아니어서 갈등했다.

오늘 아버지가 귀가 하신 후 집에서 티비 시청에 바쁘셨다.
그러나 흔쾌히 운전 지도를 해주셔서 나는 무려 집에서 부산대학교 까지 서면 - 연산 - 동래의 최고 번화가를 지나며 무사히 갈 수 있었다.
네비게이션을 달고 있었지만 아직 보면서 운전할 여유가 없어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차로 통과는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문득 날짜를 보니 한국어 시험이 얼마 안남았는데 교재조차 없어서 급히 신청하면서 몇만원이상이면 얼마 깍아준다는 상술에 휘말려서 이것 저것 신청해버렸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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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얼굴에 만족하는 표정 - 유시민


아래 주소에서 우리는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에 참여 할 수 있다. 당원이 아니라도 회비 한번 낸적 없어도 국민투표 (오픈 프라이머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뽑을 사람이 없어서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욕만 하고 방관하는 자세는 용납되지 않는다. 대통령 선택의 폭은 너댓배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것은 대통령 선거의 과정일 뿐이다. 도중에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탈락되었다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선 안됀다. 결과에 승복하고 차선책을 찾아 지지하는 모습은 후보에게 뿐만 아니라 유권자에게도 요구되는 미덕이다.
http://undp.kr/dsn/sub_mobile_p02.php

중석이랑 강연을 듣고 상언이 형을 만나 화교가 하는 중국집에서 소고기 라조육을 먹었다. 세명이서 먹고 거의 오만원 낼 줄은 몰랐다만 나는 감사히 먹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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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늙어보이는 젊은이;;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동방을 갔다가 준의 생일이란걸 알았다. (그것도 한참 뒤에) 그래서 특별히 후배지만 뽀샵했다.
by 아이파크 2007. 9. 20. 17:13
1.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이다. 무언가를 바라거나 자신의 생각 속에 이끌어 들이는 것은 변질되기 쉽다. 따라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실재하는 것만을 보아야 하는데 이는 대상과 주체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있어야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참된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고독이 필요하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베푸는 사람이 드러나는 경우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의무적인 감사를 수반하기 때문에 종속적인 인간 관계가 형성되게 된다. 이럴 경우 은혜나 감사 둘 다 순수하지 못하고 더렵혀진 것으로 변하게 된다.

시몬느 베이유 -1909~1943,  프랑스 여류 철학자,스필가,극작가로 사후 명성을 떨친다. 전시 레지스탕스 활동까지 하다가 연국 요양소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지나친 금욕 생활과 이상적 정열적 사상으로 기인 취급을 받았으나 사후 세계고(苦)를 응시하며 절대성을 추구한 그녀를 파스칼이나 키에르케고르에 비견하기도 한다.
by 아이파크 2007. 9. 15. 19:16
미학적인 아름다움은 비교할 수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가 아름다운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아름다운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말 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인간이 존엄한 존재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와 닿아 있는 질문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인간 답기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인간같지 않다거나 짐승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그들이 인간이 아닌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선택 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태어난 대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선택할 수 있다.

이러한 선택의 능력은 자유의지로부터 온다. 인간이 인갑답기를 선택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인 자유의지는 그 이름 그대로 인류 최고의 가치로 칭해지는 자유를 낳았다.

성경에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고 하였고 이 형상의 핵심은 자유의지에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제외한 그 어떤 존재보다 자유롭다. 완전한 신이 만든 세상에 인간이 악으로 존재 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것으로 설명 할 수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유의지를 가짐으로써만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자유의지를 어디에 쓰고 있는가 인간답기 위한 아름다울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있는가.

by 아이파크 2007. 9. 9. 00:17

디워 사태에 이어 피랍사태를 대하는 네티즌들을 보고 글을 쓰게 됨.

1. 위험한 나라에서 공격적 선교를 해야하나

이는 방법론의 문제이다. 먼저 선교에 대한 소명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선교의 효율성에 대해서는 선교 당사자가 결정할 문제이며 타인이 간섭할 권리는 없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안에서 자유는 보장받는게 당연한데 이에 대해 돌을 던지는 자는 무법자에 다름아니다.(그 나라 법에 대한 문제는 생략)

2. 피랍자들은 국가와 국민에 손해를 끼쳤나

끼쳤다. 그러니 사과도 한것이다.

3. 피랍자들은 (법적)죄가 있나

없다. (죄형 법정주의 참조) 위험한 지역에 가지 말란 말을 무시한 사람이 위험지역에서 놀다가 납치당하면 납치범의 죄인가  납치당한 사람이 죄인가? 더군다나 선교건 봉사건 선의로 갔는데 그게 죄라고 할 수 있는가. 특히 법적으로 죄가 없음에도 일부 사람들 생각에 도의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해서 죄를 묻는 다는 것은 법과 자유민주주의를 무시한 어처구니 없는 발상이다.본인이 전제국가의 왕이나 신이라도 된듯한 오만함이 가엽다.

4. 구상권 행사해야 하나

피랍자들은 법을 어긴 적이 없다. 정부 권고를 무시한 것에 대해서 구상권을 청구한다면 이는 상징적 의미로 최소화되어야 할 것이다

5. 피랍자 어머니의 교회 간증에 문제 있나

교회 간증이란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뜻한다. 종교적이자 사적인 문제로 카톨릭의 고해성사와는 주제가 다르지만 그만한 신성성과 권위를 지니고 있다. 세계 역사에 간증으로 왈가왈부 떠들어 대는 경우가 있었나 싶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건에 대한 네티즌들의 분개를 이해할 수 없다. 무신론자라도 유신론자를 존중해야 함은 당연한데 간증에 대한 비난은 유신론에 대한 비난과 다르없고 이는 또다른 독선과 마녀사냥일뿐 민주주의는 물론 존중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으로 사료된다. 덧붙이자면 기독교의 신은 전지전능전선한 것이기에 언제나 감사와 경배를 받아야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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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네티즌들은 뜨거운 가슴은 있으되 차가운 머리 대신 녹아버린 뇌가 있는 듯 보인다.
자신이 법위에 존재한다는 독선과 자신이 정의라는 착각에 빠져있고
법이 무언지 민주주의가 무언지 알지 못하고 논리적 사고조차 결여되어 있다.
(어이쿠 절대 다 그렇다는 건 아니고 인신공격도 하면 안되는데 몇자만 썼다)

본노로 인한 판단은 어떤 때라도 올바르기 힘들다. 먼저 자신이 분노한 이유를 생각해 보고 그 이유가 타당한지 검토한 후 비판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by 아이파크 2007. 9. 5.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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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후련했다.

로고가 촌스럽고 친구도 아니기 때문에.
by 아이파크 2007. 9. 2.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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핥고 싶다

핥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던가

말하지 않는 나의 혀도

핥고 싶다

그 선을 따라 핥아가고

그 면을 혀끝으로 느낀다

뿜어져 넘치는 침은

타는 목을 적셔 내린다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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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두꺼운 공기

소실점 없는 시선은 힘겹게 닿는다

공기 층에 겹겹이 쌓인 소리는

아래로 아래로 붉게 침전한다

고막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늘어진다

피부를 짓누르는 대기에 잔털마다 나태가 맺힌다

펜을 집는다. 끼그덕 관절의 기동음

근육 사이에 옹기종기 붉은 젖산

뇌를 침식해가는 젖산

문틈 사이로 녹슨 벽이 보인다


                         07.0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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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아름다운 틈을 들여다 볼 수 없다

틈에 눈이 아로 박히게 된다 해도

그 아름다움을 억할 수 있다면 족하리

외눈으로 다시 틈을 찾아 휘청거린다

오오 아름다움이여 너의 빛은 내 두개골 안쪽까지 닿았구나

토해내라 찬미의 비명이여. 광폭한 헐떡임으로 널 갈구하리니

빛의 혀를 낼름거리는 틈이여


                           07.08.24 독서실 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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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즐즐즐즐즐즐즐

닥치고 버로 닥치고 버로 박치고 버로

버러우 버러우 버러우

등꿟쎅 등꿟쎅

강풍 강풍 강풍

기억해라 쿠투치파 쿠투치파 쿠투치파

우랄알타이의 돈은 기타춘풍이라

닥치고 버로 버로 버로

즐즐즐즐즐----

                  07.08 독서실 출퇴근 중

by 아이파크 2007. 9. 1. 09:44

류민에게 감사를 전하며
류민아!  힘세서 좋겠다! 기어스틱도 부러뜨릴수 있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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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했던 길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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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장을 위해..


by 아이파크 2007. 8. 27. 2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