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있는 자가 사랑을 얻는다!
...는 이야기를 하려는게 아니다.

용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재활용 가능한 플라스틱 용기와 ...
아니 지금은 분리수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겁이 없는 용기 (대부분 만용)와
겁을 극복하는 용기이다.
겁이 나지만 무언가를 위해 (신념이라던가) 나아가는 용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기에 더욱 가치있고 고귀한 것이다.

사랑도 이와 같지 않을까. 어려움을 극복하는 사랑이야말로 더한 사랑이다.

I LOVE YOU.
by 호연lius 2008. 6. 18. 01:14

나는 블로그에 달리는 댓글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블로거라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요즘의 나는 좀 더 절실하다.

젊은 날에는 누구나 나르시시즘에 빠져보기도 한다.  오늘날에 이를 인터넷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주 쉽고 재미난 일이다. 그리고 젊은 날의 끝에는 청춘이 달콤했던 것만큼 쓴 불쾌한 감정에 휩쌓이기도 한다. 그리고 인터넷은 안전벨트 역할을 해 줄 수 있다.

아무의 댓글도 없는 블로그라면...   지금의 나로서는 벽을 보며 자위하는 것과 다를게 없을 것이다. 쾌감을 잃은 체 답습적으로 반복하는 행위에는 과거의 쾌감에 대한 그리움으로 너무나도 허망해서 자신의 현재를 모욕하고 마는 모사의 모사행위를 하는 것 뿐.

섹스에 대한 모사가 자위라면 그 자위에 대한 모사를 하는 것이 내가 아닐까.  행복하지 않고, 행복을 꿈꾸지도 않으며, 행복을 꿈꾸던 시절을 꿈에 그리는 ... 그리고 그런 자신에 소름끼쳐하며 입을 틀어막고 숨죽여 우는 청춘.

그 너머로 밀려나지 않도록 손 잡아주는 사람들이 고맙다.  

나는 최후에 승리하게지만 부분적인 패배는 피할 수 없고 그 아픔을 최소화 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by 호연lius 2008. 5. 12. 11:15
대학 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참 열공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열공했습니까?

아녀 놀기만했져 ㅋㅋ (학점 4.1)

그냥 대충 한거 같아여. 좀더 할걸 하는 생각 이제서야드네여. (과수석 졸업)

전혀 안한거 같아여 ㅜㅜ (학점 3.7)

학점? 잘 놀았지 ㅋㅋ (학점 3.8 /  9학기)
 
즉 열공한 사람은 없다.

저 대답을 듣고 내가 말한다.

아, 나만 열심히 했구나...

사람들의 반응은 대략

죽을래?
미쳤어요?
니가 제일 안한거 같은데..
그럼 난 죽도록 열심히 한걸로 ㅋㅋ

이것으로 사람의 마음은 객관적 결과물과도 관련 없고 다른 사람의 눈과도 관련없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들은 진실로 대충했다고 생각하고 나는 진실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날라리가 모범생을 비웃는 세상! 모범생이 날라리보다 학점이 낮은 세상!
세상이 어떻건 난 열심히 살아간다.
by 호연lius 2008. 4. 13. 13:43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37580

남대문을 보존합시다. 서명 부탁드립니다.
by 호연lius 2008. 2. 11. 23:08

12월에 들어서면서 나는 좀 맛이 갔다. 아니, 나는 좀 맛이 가야겠다.

무엇이든 기억하고 싶다. 무엇에도 감동하고 싶다. 비록 순간일지라도 가치를 부여하고 최선을 다해본다. 블로그의 제목처럼 나는 내 인생의 한 場의 마지막 페이지를 지금 쓰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도 빛나게 무엇보다도 깊게 세기고 싶다.

그래서일까. '이 푸른 하늘에 약속을' 은 내가 더 깊이 빠져서 즐길 수 있었다. 파르페 쇼콜라가 그림동화라면 이 작품은 청춘 티비 드라마와 같은 느낌이다. 시간마다 변하는 배경과 스크롤을 이용한 연출이나 다양한 캐릭터 스탠딩 그래픽은 제작사의 기술과 정성이 고스란히 드러나 완성도를 극한으로 끌어 올린다.

할렘물에 엣치한 게임이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장님 코끼리 만지듯 고정관념만 붙잡고 있진 말자. 긴 엣치 장면이 내 몰입을 방해할 정도로 즐거운 드라마라서 거길 스킵해버릴 만큼 재미있었다.

1년 뒤에 모두 헤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전에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헤어지기 전에 더 많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아름답고 안타깝고 그래서 더욱 나와 겹쳐느껴졌는지도 모른다.

회자정리 會者定離

그렇기에 우리는 순간을 더욱 열심히 소중히 하고

그렇기에 다시 만나기 위해서 애쓴다.

내가 고향을 떠날 때에는 두터운 친구들에 대한 신뢰와 경험해보지 못한 자의 무지로 두려움 따위 털어내 버릴 먼지 정도 뿐이었다. 지금은 내게 그런 먼지가 얼만큼이나 쌓여있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즐거울수록 헤어질 때 더 괴로울 것이다. 지금 그저 그렇다면 나중에도 그저 그럴것이다. 괴롭고 싶지 않아서 다시 만날 것을 알 수 없어서 대강 보내버리는 삶을 살것인가. 한가지 확실한건 다가올 미래가 싫다고 피해버리면 (멍하게 있으면) 현재도 미래도 남지 않게된다. 이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우리는 살아가야한다. 변화시키고 변화당하며 살아가야 한다.   지금 즐거운만큼의 강한 반작용이 올것이기에 무섭다.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것들이 무섭다. 그래서 차라리 모든 것이 내게 있을 때, 내 손으로 부숴버리고 싶기도 하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나도 강한 충동에 끌린다. 하지만 알고 있지 않은가. 부숴지면 다시 만들면 된다. 애써 자기 손으로 부수는 낭비를 할 필요는 없다. 인생은 무너진 터위에 한단 한단 쌓아 올리는 것이다. 시간 앞에서 더 높이 쌓을 수 있는 사람이 더 행복할게다.

지금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눈빛이, 밥숟가락이 그리고 침묵이  모두 다시 만날 날을 약속하는 순간이다.

엔딩곡 '안녕이라는 말 대신에'를 들으며 울고싶었.. 울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우는 이유는 충분히 공감한다. 그래, 진짜 울고 싶은건 나다.

나는 고향의 섬에서 자랐고 나는 지금 졸업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참고 : 이 푸른 하늘에 약속을 공략 - 원하는 캐릭터를 무조건 만나면 된다. 전 캐릭터 엔딩을 보면 약속의 날 메뉴가 나타나며 엔딩을 볼 수 있다. 약속의 날을 보고 나서 다시 플레이 할 때 '아카네의 조금 우울한 날' 이벤트를 다시하게 되면 아카네 엔딩을 볼 수 있다. 총 플레이  20시간 이상

덤 : 제목은 '이 푸른 바다에 약속을'이 좀 더 어울리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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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 여왕 나오코

by 호연lius 2007. 12. 19. 01:34

결여

살다보면 자신의 어떤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결여된 것, 그 자체에 집중해서라기보다 반대로 지금 내게 가장 부풀어 오른것 즉, 너무 과잉한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했을 때 그 이면에서 발견하게 되는 부가적인 것이다.

하지만 결여는 깨닫는 순간 과잉보다 더 큰 충격을 주고 모든 것은 그 결여된 틈에 매몰되어 버릴 수도 있다. 결여를 매꾸려는 노력은 무턱대고 쏟아서는 안된다. 도리어 자신을 그 틈에 매몰시킬 수도 있다.

과잉으로 인해 결여를 깨달았다는 사실을 잊지말라. 결여를 과잉화하려는 노력은 또 다른 결여를 불러올 수 있다.

결여를 매꾸는 쉬운 방법은 과잉을 줄이는 것에 있다.

중독되지 말라. 중독은 과잉을 불러온다.

위험한 곳은 피해가라.

자극은 차단하라.

나를 보라.

by 호연lius 2007. 12. 6. 10:01

몇 년만에 다시 읽은  비주얼 노벨 (영상 소설) '파르페 쇼콜라'는 홍체리와 에스페란사등 뭇 누리꾼들의 추천에 나도 한표 더하는  작품이다.

음성이 나오는 건 처음해봤는데 역시나 감동적이었다. 모두가 '프린세스 메이커3'가 재미없다고 혹평할 때 나는 그 목소리 때문에 즐겁게 플레이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나의 청각은 직접적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감각이다.

주인공 히토시는 꽤나 좋은 대학에 다니는 대학 3학년 청년이다. 배경이 일본인만큼 예비역이 아닐뿐더러 재수도 하지 않은 젊은이다. 나보다 몇살 어린 청년이지만 그 나이를 군대에서 보내버린 탓에 어떤 감수성을 가지고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 나이인지 명확히 공감할 수는 없었다. 최대 장점은 계란을 다루는데 천재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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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크롭)


여주인공 리카코는 히토시의 대학 동기이다. 새내기 환영회부터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누구보다 머리가 좋고 상대에서도 눈에 띄게 미인이지만 너무 이성적인 사람이고 딱딱한 말투를 지닌 탓에 친구는 몇명 없다.(그 말투가 일본어 공부하기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는 매력적이다. 혹자는 엣치 때에 쉰목소리가 질색이라고도 하지만 그 감격어린 목매임이 작품에 감동을 더해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음성만 들으면 일단 알아들을 수가 없고 하니 비판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주인공의 이름을 가장 많이 부르는 캐릭터이다. 이름부르기는 일본에선 분명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한국도 그렇긴하지만 비할바는 아니다. 하지만 누가 내이름을 그렇게 불러대는건 역시 익숙치 않다. 제일 많이 불렸던건 역시 군대에서 였을 것이다. 아, 쓸때 없는 이야기로 감상을 망치는군...
이 캐릭터로 우리 남자들은 교훈을 얻어야한다. 겉보기와 속은 다를 수 있으며 감정과 행동도 다를 수 있으며 사실은 그게 다 내 탓일 수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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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사랑은 원망을...




비주얼 노벨이라서 그렇다곤 하지만 이야기는 너무나도 주인공에게만 집중되어있다. 다시 말하자면 두 주인공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집중되어있다. 엑스트라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아는 선배 아는 후배 물론 친한 친구도 없다. (아스카는 있다만) 이것은 일인칭 작가시점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이유로 남자 주인공이 최고의 여자들과 생활하는 것만 보여주는 것은  왠지 분하다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할 꺼리를 남겨주는 것이 히토시와 리카코의 이야기의 좋은 점이다. 두 사람의 태도나 판단에는 반박의 여지가 남아있다. 나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 좋은 결과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랑의 크기에 있어서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렇기에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리카코는 노멀과 트루엔딩 외에 배드엔딩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너무 쉽게 무너지는 히토시이다. 결국 해피와 언해피의 차이는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극복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교훈적으로 보여준다.

에마 루트는 재미있고, 아스카는 전통적이고, 유이는 음악이, 레아는 츤데레의 맛이 있다. 카스리는 그냥 보너스라는 느낌이니 에너지를 잘 배분하자.


참조  - 영어 제목은 파르페 쵸콜렛이다. 쇼콜라는 쵸콜렛의 불어이다. 가게 이름인 파미유는 프랑스어로 가족인데 원음은 파미으에 가깝다. 알파벳을 영어식으로 파밀리에라고 읽으면 그건 독일어가 된다.
히토시가 20세라고 나오는 것은 만20세라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일본은 한살 먼저 입학하나보다. 좋겠네 청춘이라.




by 호연lius 2007. 11. 22. 11:22

행복

고대 그리스 스토아 학파에서는 행복에 대한 간단한 공식을 만들었다.

행복 = 달성 / 욕망

즉 행복치를 증가하기 위해서는
달성치를 높이거나 욕망치를 낮추면 된다.

달성치를 높이고자 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욕망치를 낮추는 방법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물론 중국의 철학자들을 통해서도 꾸준히 추천되어 왔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대라는 것은 흔히 알려진 사실이나 이는 수행을 통해  조절이 가능함을 심지어 마이너스로 만들 수도 있음을 많은 성인들이 보여주었다.

현재 서점에 나온 책을 보면 욕망을 낮추는 법보다 달성을 높이는 법에 대한 책(자기계발서)이 훨씬 많다. 우리 시대에 달성(=성취)의 증가를 욕망의 감소보다 중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분석했다.

욕망은 인간의 내적으로 수렴하고 성취는 외적으로 수렴한다. 즉 성취는 자신뿐만 아니라 세계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는 발명과 발견이다. 이는 개인의 영광일 뿐만아니라 세계 문명의 발길이다. 또 다른 예는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지위의 획득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즉, 나의 성취는 '인류에게 위대한 한 걸음' 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처음 언급한 바와 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경우 세상을 더럽힐 뿐인 것이다.  
by 호연lius 2007. 10. 6. 14:40

이 사람들이 법 이야기를 하니 지금 법학을 공부하는 내가 좀 더 설명하겠네.

이건 마치 무임승차 적발시 징역이 아니라 과징금을 먹이는 것과 비슷한거라네.돈의 크기만 차이가 있을뿐 죄질은 동일하다고 보는게 옳다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법(미국등은 안그렇단 소리라네)은 죄질을 달리 규정하고 처벌을 달리하기에 이는 법 내부 논리를 흐뜨러트리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

평등적용의 문제라면야 먼저 이야기 했듯이 그렇다면 무임승차도 징역 살아야한다네. 반대로 말하자면 다른 경제범들도 똑같이 적용하면 되는거구말이야.

전두환의 경우는 추징금을 못내고 있는데 기간내에 못 갚으면 당연히 징역이네. 징역이란 구금과 달리 복무 중에 역(노동)이 부과되는 형벌임을 덧붙이네.

마지막으로 유전무죄,무전유죄의 가장 단편적인 예는 우리나라특유의 제도인 '합의' 제도라네. 폭행과 같은 형사상의 범죄도 '합의'가 가능하고 합의란 대체로 경제적 보상인 고로 유전무죄란 말이 나온거지. 하지만 이 역시 반대로 보면 피해자가 돈을 원해서 그런 것일뿐 합의 안하면 징역이네.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든것은 위정자뿐만이 아니라 피해자 자신임을 잊어선 안되.

by 호연lius 2007. 10. 3. 23:14
1.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이다. 무언가를 바라거나 자신의 생각 속에 이끌어 들이는 것은 변질되기 쉽다. 따라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실재하는 것만을 보아야 하는데 이는 대상과 주체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있어야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참된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고독이 필요하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베푸는 사람이 드러나는 경우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의무적인 감사를 수반하기 때문에 종속적인 인간 관계가 형성되게 된다. 이럴 경우 은혜나 감사 둘 다 순수하지 못하고 더렵혀진 것으로 변하게 된다.

시몬느 베이유 -1909~1943,  프랑스 여류 철학자,스필가,극작가로 사후 명성을 떨친다. 전시 레지스탕스 활동까지 하다가 연국 요양소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지나친 금욕 생활과 이상적 정열적 사상으로 기인 취급을 받았으나 사후 세계고(苦)를 응시하며 절대성을 추구한 그녀를 파스칼이나 키에르케고르에 비견하기도 한다.
by 호연lius 2007. 9. 15. 19:16
미학적인 아름다움은 비교할 수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가 아름다운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아름다운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말 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인간이 존엄한 존재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와 닿아 있는 질문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인간 답기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인간같지 않다거나 짐승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그들이 인간이 아닌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선택 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태어난 대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선택할 수 있다.

이러한 선택의 능력은 자유의지로부터 온다. 인간이 인갑답기를 선택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인 자유의지는 그 이름 그대로 인류 최고의 가치로 칭해지는 자유를 낳았다.

성경에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고 하였고 이 형상의 핵심은 자유의지에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제외한 그 어떤 존재보다 자유롭다. 완전한 신이 만든 세상에 인간이 악으로 존재 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것으로 설명 할 수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유의지를 가짐으로써만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자유의지를 어디에 쓰고 있는가 인간답기 위한 아름다울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있는가.

by 호연lius 2007. 9. 9. 00:17
2일부터 4일까지 주바라기 캠프에 다녀왔다.

승합차로 세시간 이상 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무더운 여름날 에어콘이 닿지 않는 맨 뒷자리에서 고생한 두 형제에게 더 큰 은혜가 있길.

김천 대학은 생각보다 넓고 넓어 (부대만큼은 아니라도) 여름에 탈진 할 정도는 되었다.

이건 뭐 가자는 사람도 오라는 사람도 없는 수련회를 몇년만인지도 모를 정도로 오랜만에 불현듯 가게되었다. 이런걸 계시라고 하는건가.

최근 나의 행적과 아프간 사태로 실타래처럼 굴러다니던 나의 심령이 주님의 손길로 굳은 반석위에 벨벳 카펫이 깔린 왕도가 되었다.

사람들은, 불신자는 물론 신자들 까지도 어째서 잊고 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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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찍은 사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by 호연lius 2007. 8. 4. 14:52

사람들

아직 4반세기 살았을 따름이고 살면서 특별히 많은 사람을 만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란 것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생각한 바는 있다.

이영도의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에서 많은 것을 배웠기에 작품에서 예를 들며 주절거려 볼까한다.

드래곤 라자에서 제일 유명한 말은 '인간은 단수가 아니다' 로 인간의 사회성과 그로 인한 인간의 힘을 강조하는 어구다.

하지만 내가 깨달은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독립성이다. 개채 수가 늘어나면 돌연변이의 수도 늘어난다는 것은 상식이고 인간은 어쩌면 그런 법칙에 가장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만 그 비율은 개미같은 곤충에 비할 바가 아니다. 천마리의 개미를 가지고 실험을 하면 모두 같은 결과가 나온다. 천명의 인간을 두고 실험을 하면 적어도 두가지이상의 결과가 나올 것이다. 어쩌면 천개의 결과가 그리고 다음 실험에서는 또다른 천개의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드래곤 라자에서 엘프는 이루릴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루어 볼때 이루릴은 엘프종에 있어서 돌연변이라 부를 만하다. 엘프중에서 가장 유연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엘프와는 다른 생각을 할수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그런 이루릴이 말한다. '인간은 모순적이예요. '

한박자 건너뛰고 말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다양한 정도가 아니라 가지각색이다. 그런점에서 인간을 가장 닮은 종족은 드래곤이다.

드래곤이라는 종은 같은 종이면서도 그 개체는 서로 다른 종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다양하다. 석양의 감시자 아무르타트는 블랙 드래곤이다. 질서악(이기적이나 이성적인 규칙이있다)의 가치관을 지니고 있고 입에서 염산을 내뿜는다. 캇셀프라임은 화이트 드래곤이다. 질서 중도덕(추정)의 가치관이고 입에서 냉기를 뿜는다.  블루드래곤 지골래이드는 마법에 정통하고 번개를 뿜는다 . 각 드래곤은 자신의 에너지를 숨으로 내뿜을 수 있고 그런 에너지에 대해 면역력도 가지고 있다. 물리적 육체는 같지만 내부를 이루는 화학적 성질은 다르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모두 다르다. 크림슨 드래곤 아무르타트는 세상에서 선과 악의  균형을 지키고자 한다. 아무르타트는 영역내의 인간을 사냥한다. 지골레이드는 라자에 의해 인간을 돕는다. 드래곤로드는 한때 세상을 지배하고자 했다.

어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자하고 어떤 인간은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고자 한다.
어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위해 죽고자하고 어떤 인간을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살리고자 한다.
인간내부의 수만가지 동기와 그로 인해 내려지는 수만가지 판단은 한 인간조차 다양하게 비취지게 만든다.

그래서 이루릴은 인간이 모순적이라고 했다. 전혀 다른 인간이 같은 행동을 할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다른 서로가 어울릴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by 호연lius 2007. 7. 4. 00:50
사진을 찍기 시작한지도 오년이 지났습니다.
그 중에 삼년은  셔터스피드가 뭔지만 이해한채 (아버지께 들어서) 조리개도 모르고 찍으며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사진은 나아졌고 내가 좋아하는 사진도 생겼습니다.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사실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은 탓입니다. 친구나 가족들과 보낸 수많은 추억들이 혼자 있을때는 전혀 떠오르지 않다가 서로 옛날 이야기하며 그들의 입으로 통해 들으면 '내가 그렀게 행복했구나!' 하고 놀람을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중고딩 때 처럼 일기를 쓰려고 시도하였으나 불규칙한 생활속에 일기는 무리였습니다. 저는 행복한 순간들을 다 망각하기 전에 대안을 찾아야 했습니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해가면서 불만족과 갈망의 늪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눈이 뜨이는 고통이라 생각하며 자위했지만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보며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통칭 '장비병'에 걸려서 그저 타인을 부러워하며 자신의 현실을 한탄하였습니다.  대학에서는 현대사회와 소비에 대해 배우면서 '이상은 소비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저는 사진이 돈많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면 발을 들이지 았았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나가 아니라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인가를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사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것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과도  같죠.  '주체' 그러므로  ,

'사진의 제 1 은 피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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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DC에 올린 사진


스르르 클럽의 1면에 모델들이 오가는 이유는 그런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저의 사진들을, 유명한 사진가들의 사진들을 다시 살펴 보며 좋은 사진이 뭔지 탐구했습니다.

'감동이 있는 사진'  그것은 당연한 말이지요. 어떤 것이 감동이 있는 사진인가 살펴보았더니 그 사진 안에는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이 들어있었습니다. 사진 안에는 피사체간의 소통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는 어머니와 아이의 소통일 때도 개와 사람의 소통 일때도 대자연과 인간의 소통 일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사진들에는 피사체와 사진가와의 소통이 담겨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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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액자 넣은 사진



그리고서야 장비병을 훌훌 털어버리고 좀더 가볍지만 진지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적어도 제가 추구하는 사진이 무엇인지 알아내었다는 것에 5년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사진이란 결국 세상의 반영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고 감동을 주는 것은 소통입니다. 사람도 인생도 중요한것은 주인공이 되는 것이고 추구하는 것은 소통입니다.

우리 좀 더 우리 답게, 우리 좀더 통하게.
by 호연lius 2007. 6. 1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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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도 하지말고 나쁜 점수도 받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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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화자는 열심히 하지 말자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점수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나쁜 점수를 받지 말자고 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좋은 점수를 받고자 하는게 아니라 나쁜 점수를 받지 말자고 하는 것으로 화자의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일면 체념적이라고 까지 할 수 있는 어조를 보인다. 열심히 하지 말자는 말과 함쳐지면 이는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모든 것을 포기할만큼 절망적이지는 않지만 무언가 간절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체념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점은 작가의 경험을 비추어 보면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작가는 직전 1년간 가장 노력한 과목의 성적이 가장 나쁘고 가장 대충하고 성적이 좋은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작가의 노력과 성적은 상관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고 위 문장은 결과에 대한 노력이 무위로 돌아 간것에 대한 한탄이 드러나있다고 할 수 있다. 
by 호연lius 2007. 3. 9. 04:13

기차


칙칙폭폭하는 소리가 들릴리는 없다.

무궁화가 가장 후지다고는 하지만 증기기관을 벗어난지는 골백년전의 일. 대략 반천킬로미터의 거리를 다섯시간남짓해서 가는 것은 편균시속 백킬로미터라는 계산이 나온다. 관성의 법칙에따라 기차 간에 가만히 쭈그리고 있는 나도 시속 백킬로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된다. 상상해보라. 쭈그리고 앉은 모양새의 25세 사내가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을. 그야말로 신기하고 꼴볼견일테다.


이렇게 기차창 밖으로 하늘이 파랗게 파랗게 펼쳐지면 우울하다. 저 파란 하늘아래 시속 백킬로로 섹스하며 날아가는 그네들을 떠올리니 치가 떨린다. 쭈그리고 날아가는 모습만 해도 코미디이거늘 접붙는 모습은 어떠할까. 혹 나란히 누운 모습이라면 덜 민망할지도 모르겠다만 기차간에서 그럴리가 없다. 아아, 비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가 왜 아름다운지 알아버렸다. 빗소리와 기차소리는 저 신음소리를 삼켜버리겠지.


차장, 어쩌면 부차장인지도 모르겠지만 가끔씩 지나다니면서 무언가를 점검한다. 유럽처럼 표검사는 없다. 다만 기찻간에서 엉뚱한 짓을 벌이는 년놈은 없는지 감시하는 걸까? 어쨰꺼나 그는 쭈구리고 앉은 나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앉아 있는 승객보다도 서있는 승객이 나에게 눈길을 준다. 왜일까. 왜날쀍.


좁은 턱에 걸쳐 오래 쭈그리고 앉아 있다보면 엉덩이가 저리기 마련이다. 의자는 허벅지까지 확실하게 받쳐주는 그러면서 체중을 고루분산시켜 주는 것이 좋다. 살짝 일어나서 엉덩이를 푼다. 슥 둘러본다. 한자리 빈자리가 있다. 다만 그곳에는 여자라면 절대 같이 앉으려 하지 않을 - 나도 옆에 앉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게하지 않는 그런 중년인이 앉아있다. 하아...기차의 제일 뒷칸으로 몸을 움직였다.


기차의 마지막칸도 그저 일반 객차와 다를게 없다. 문은 걸쇠가 걸려있어 열리지 않게 되어있지만 누구라도 걸쇠를 열수있다. 나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 잡힌다. 문을 열어도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뛰어 내린다고 해도 누구도 알 수 없지 않을까. 살짝 열고 사진만 몇방 찍어볼까. 아니면 시원하게 싸버릴까. 아예 뛰어 내려버릴까.


기차가 우리집을 지나칠때 이런 갈등은 극에 달했다. 이놈의 기차는 눈앞에 보이는 집을 지나 십여분은 더 달린다. 역에서 집으로 돌아오려면 대략 한시간은 더 걸릴테다. 여기서 뛰어 내린다면 한시간은 벌수 있다. 내 무릎이 견디어 줄까? 코너에서 얼마나 속도를 떨어뜨릴까?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쓰기시작한 이 글은 이제 멍한 것보다 더 무료해지고 있다. 이즈음에 글은 접어야 할테다. 식당칸이 없어서 도시락의 유혹자체가 없는것은 좋은 일이었나.

by 호연lius 2006. 6. 18. 14:20
내가 유머를 추구하게 된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분명 그리 오래전 일은 아니었다

청소년기의 나는 맑고 진지하고 사춘기적 광기에 취하기도 하는 순진한 녀석이었다. (아마도)

나는 나를 알고 있었지만 나는 변화하는 중이었고 그 변화의 끝에 성장한 나를 발견 할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대학에서 어른이 되고 완성된 나를 발견 할 줄 알았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기대되었다. 완성된 나를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청소년기의 나는 스스로에게 대단히 만족했다. 천재는 아니었고 괴로움도 있었지만 노력은 결과를 가져오고 행운은 믿음을 가져왔다. 그렇게 자라서 그런 (완벽한) 어른이 된다면 오만해지지 않을까 두려울 정도였다. 이상한 놈으로 보이건 특별한 사람으로 보이건 나는 달랐다. 그 다름은 스스로를 잘 볼 수 있게 만들었고 그게 바로 나의 정체성이되었다.

부모님과 친구들은 나를 좋아했고 그래서 나는 나를 확신했다. 이것이 바른 길이라고 이것은 곧은 길이라고. 그래서 나는 내 예상이 옳을 것이라고 오해해버렸다.

그러나 스무살이 넘어서 나는 나의 평범함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평범한 인생- 짝사랑, 연애, 여러 압박들, 그러나 불행한 사건은 찾아 오지 않는 -그리고 나는 여전히 어른이 아니란걸 알았다. 어저면 영원히 어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영원히 미완으로 남겨질 것이란 것을 그것이 평범한 것이란 것을 알았다.

나는 그 평범함이 무서웠다. 평범함은 무지하고 우둔하고 어리석은 바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커왔는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다면 비범하게 죽고 싶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을 떠올렸다.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고 말한 성웅. 망상 속에서 나는 이순신이되어 '전투가 급박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고 말했다. 그런데 내 말을 듣고 있던 부하가 외쳤다. 'What?' 그는 금발머리에 파란눈의 코쟁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나는 트라팔가라 해전에서 나폴레옹과 싸우던 중이었다. 나는 영어를 몰랐고 그래서 코쟁이는 나의 죽음을 알려버렸다. 어이없는 개그적 망상에 나는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마침내 나의 진짜 재능에 눈을 떠버렸다.

유머

나는 유머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평범함 속에 행복이야 말로 가장 잡기 어려운 파랑새라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와 비슷한 시기였다. 그 파랑새는 내 어깨위에 늘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잡으려고 했을 때,

'그런걸 깨닫다니 넌 이미 평범하지 않아'

평범함을 싫어하던 내가 나의 평범함을 깨달은 것과 폄범함 속에 행복의 가치를 발견한 복합적 요인은 나를 그 길에서 집어 던져 버렸다.

'우어우어'

그래도 유머는 내 안에 남아있어줘서 다행이다.
by 호연lius 2006. 5. 22. 17:57
점심은 주로 혼자 먹는다.

친구들은 주로 나가서 먹는다. 혹은 시켜서 먹는다.
비슷하지 않으면 어울릴 수 없다고 어울릴 수 없다면 친구가 아니라고 그랬던가. 무슨 빈부격차도 아니고 나만 이렇게 가난한건지 그들의 중식을 따라 갈 수가 없다. 가랑이 찢어지는 뱁새가 되기보다는 분수에 맞게 혼자 밥이나 먹는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분하다.

아, 잠시 잊었구나 내가 혼자 밥을 먹을 때도 너는 내 곁에 있음을. 너는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음을 나는 혼자가 아님을.

by 호연lius 2006. 3. 28. 12:59
나는 나의 데이터를 통합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일기장이 있으며 수첩이 있고 다이어리가 있으며 블로그가 있고 싸이월드가 있다. 이 정보와 기록들은 대체로 중복되어 있지 않으며 검색하기 쉽지도 않고 정렬되어있지도 않다.

제길 정리된게 없는 인생이다. 업적이 없으면 일상이라도 정리해서 내보일 수 있으면 좋은 일 아니겠는가. 역시 피디에이를 이용해서 통합환경을 구축하는 길밖에 없단 말인가.

열흘을 살아왔고 스무날을 더 살아가야지 하나의 목표점에 달할 수 있다. 아무것도 안해도 그 목표점에는 달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육백일 후의 인생의 목표.

친구여 주여 내게 힘을.
by 호연lius 2006. 3. 8. 15:39
작년이 갑신년이었으니 올해(조금 남았지만)는 을유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느덧 나이도 두갑자를 자시고 이제 완연히 어른이다라고 말해야만 할까.
갑신년은 무엇이 그리 신나서 들떠 있었을까. 나는 갑신이되면 세상이 바뀌는줄 착각하고 싶어했을까.

사람이 나면 새사람이 차게 되어있다. 새사람은 차갑지만 곧 따뜻한 헌사람으로 바뀔테지. 헌사람이 되면 그네들은 또 다시 자릴 비워 다른 사람을 차게 해줄 테지만 결국 기억에서 현실로 건질 수 있는건 낡은 구닥다리 벗뿐이라는건 슬픈만큼 즐거운 일이 아닌가.

을유년에는 구닥다리에게 새로움을 새것에게 낡음을 부여해볼까.
by 호연lius 2006. 1. 10.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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