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하버마스
의사소통적 이성을 통한 계몽의 현대적 기획
I. 계몽의 위기와 ‘계몽의 변증법’의 한계
근대 계몽주의는 진보에 대한 무한한 믿음과 이를 통한 인간해방이라는 위대한 이상을 인류에게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을 실현케 해준다고 믿었던 것은 인간의 이성이었다. 계몽주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포가 인간의 무지로부터 비롯되었고, 그것이 종교적 세계관을 낳았다고 보았다. 이성과 합리적 사고는 이러한 인간을 무지로부터 해방시킴과 동시에 더 이상 자연을 공포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막스 베버는 근대의 이러한 합리화과정을 탈마법화과정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이성에 대한 과신은 문명을 발전시켰지만 그와 동시에 문명의 위기를 낳았다. 합리성으로 무장한 근대의 3가지 요소, 즉,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경제학, 그리고 관료적 행정시스템은 환경파괴와 핵전쟁에 대한 공포, 물질만능주의와 인간소외의 문제를 낳았던 것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러 서구의 사상가들은 바로 이러한 문명의 위기를 지각하고 있었다. 특히, 20세기 전반기의 프랑크푸르트학파로 대표되는 비판이론가들은 계몽의 본래 의도와 그것이 가져온 결과 사이의 커다란 괴리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려고 하였는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그 대표적인 저서이다.
‘계몽의 변증법’은 수학적 논리로 자연과 인간의 모든 것을 획일화하고 도구화하는 ‘도구적 이성’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이는 자연과 인간이 지니는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망각하게 하였고, 그 결과 나타난 것이 현대세계의 총체적 소외이며, 20세기의 전체주의적 국가체제의 출현은 그러한 소외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계몽의 변증법’은 음울한 시대를 해석하고 진단할 뿐, 그것을 극복할 적절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했다.
II. 인식론적 객관주의에 대한 비판
하버마스는 1968년 ‘인식과 관심’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아도르노 진영과 포퍼 진영 사이의 ‘실증주의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결론적으로 순수한 객관적 인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인식에는 이것을 인도하는 이해관계와 관심이 동반된다고 주장하여 아도르노와 입장을 같이 하였다.
하버마스는 현실과 관련된 다양한 인식관심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그것은 ‘기술적인 인식관심’과 ‘실천적인 관심’이다. 기술적인 인식관심은 경험적이고 분석적인 학문, 즉 자연과학에 있어서 지배적이며 실천적인 관심은 역사학, 해석학적인 학문, 즉 정신과학에 있어서 지배적이다. 그리고 자연과 사회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해결해 내려는 노력이 우리를 학문연구로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현실적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식은 없을 수 없다고 보았다. 즉, 문제해결을 위한 실천적 관심의 차원에서 하버마스가 보는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사회적 실천가능성, 그것도 인간의 능동적인 역할에 의한 실천가능성을 담보하여 해방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버마스가 두 사람의 칼(Karl), 즉 Karl Marx와 Karl Popper를 비판하는 부분에서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하버마스는 사회현상을 가치판단의 개입 없이 과학적인 분석을 시도하고자 하는 포퍼의 실증주의나 하부구조에 의한 경제결정론에 집착하는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인간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능력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된 해방의 가능성을 열어주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이러한 비판적 성찰을 보여주는 학문적 모델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발견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치료, 즉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이 의사의 일방적인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사는 환자와의 대화를 통해 환자가 근본적인 자기성찰에 이르도록 이끌 뿐이며 따라서 치료를 위해서는 환자 자신의 능동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 게다가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러한 자기성찰을 환자뿐만 아니라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에게도 요구한다. 정신분석학은 이처럼 해방이 인간주체의 자기성찰과 능동적 실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에게 중요성을 지닌다. 그와 동시에 하버마스는 정신분석학이 성찰과 실천의 차원에서 이탈하여 인간의 심리적 발전과정을 객관주의적 이론으로 정립하려 하는 시도는 단호히 비판한다. 즉, 그러한 시도는 인간을 자연과학적 법칙성에 종속시키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의 심리를 유년기의 성적 체험의 고착, 즉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설명하려는 프로이트의 시도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마르크스 비판도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된다. 즉, 마르크스는 사적 유물론을 통해 하부구조가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처럼 파악하여 인간주체의 능력이 지니는 가능성을 성찰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인식론적 객관주의는 인간을 과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하나의 대상으로만 파악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율적이며 능동적인 면을 무시하고 억압과 폭력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III. 의사소통적 이성
아도르노의 한계는 이성 중심의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대체할 다른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 이성을 도구적 이성으로만 파악한 데에서 기인한다. 보편적 이성을 오로지 도구적 이성으로만 파악하는 사유가 해방을 위한 공동의 사회적 실천 가능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공동의 선을 위한 공동의 실천은 어쨌든 보편적 이성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이러한 이성을 언어의 상호주관성에서 발견하여 아도르노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다.
하버마스 입장에서는 ‘도구적 이성’을 비판하고 있는 사유 또한 이성적 사유이다. 그것은 도구적 이성을 넘어선 이성으로서 하버마스는 이것을 의사소통적 이성으로 파악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도구적 이성의 주관적 폐쇄성과 획일성, 그리고 폭력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개방적이고 상호적인 이성이 확보되면 민주적 종합, 다시 말해 비폭력적 보편성도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의사소통적 이성을 통해 본래 계몽이 꿈꾸었던 기획, 즉 인류의 진보와 공동선의 미래에 대한 실현도 다시 가능해진다. 이런 측면에서 하버마스의 철학은 진보적 낙관주의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그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앞 절에서 우리는 하버마스가 인식론적 객관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하버마스는 인식을 구성하는 관심과 그에 상응하는 영역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형식으로 분류한다.
∘실증주의적인 인식관심 - 물질적 생산과 교환의 경제적 영역
∘신비주의적인 인식관심 - 상징적 상호작용과 관련된 의사소통의 영역
∘비판적∙해방적 인식관심 - 인간사회의 권력 및 지배관계의 영역
하버마스에 따르면 각각의 인식관심 영역은 고유성을 지니며 이들을 포괄할 수 있는 단일한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마르크스가 토대가 상부구조까지도 결정한다고 본 것과 달리 하버마스는 상부구조 역시 그 나름의 자율적인 기능과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경제적 생산력으로서의 노동과 상호작용을 구분하고 이 양자 사이의 관계가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상호작용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반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하버마스는 노동과 상호작용을 엄격히 구분하여 노동을 도구적 행위로, 상호작용을 의사소통적 행위로 구분하면서, 현대사회의 문제는 도구적 이성의 만연에 의해 물질적 영역이 의사소통의 의미 영역인 상징적 상호작용의 영역을 과도하게 침범하고 훼손한 데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도구적 이성의 일면적 강조에 의해 의사소통의 상호성과 의미가 체계적으로 왜곡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기서 하버마스의 논의는 마르크스와 차이점을 갖게 된다. 마르크스는 복잡한 사회의 문제를 단순화시켜 온 관심을 하부구조의 영역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자본가들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노동의 소외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이 되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끝장내야 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적인 혁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반면 하버마스에 따르면 하부구조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 사회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물질적 생산과 교환의 영역 이외의 영역을 고려하지 않은 도구적 이성 중심의 단순한 해법은 또 다른 모순을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구적 이성에 의해 왜곡된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사회적 모순의 해결은 그 사회가 어느 정도로 그것을 공론화하여 지양할 수 있는 가에 달려 있으며 참된 진보의 척도는 사회구성원들이 그에 대한 장애요소를 함께 인식하고 자율적 합의를 통해 그것을 공동으로 제거해 나가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신분석 치료자가 환자와 의사소통을 통해 질병을 치료해나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IV. 체계와 생활세계
하버마스의 논의를 보다 쉽고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하버마스 자신이 내세운 ‘체계’와 ‘생활세계’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 절에서 하버마스는 인식관심의 영역을 세 가지로 나누었는데, 하버마스는 이를 기반으로 해서 사회구성체를 체계와 생활세계로 구분하였다. 생활세계는 '언어'와 '행위'의 주체로서 인간들이 합리적 토론을 통해 진리를 상호 검증할 수 있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가능한 세계로서 인간 행위와 경험이 갖는 의미를 공유하는 영역이다. 반면, 체계는 간단히 말하면 물질적 자원의 생산과 교환의 영역으로 마르크스의 ‘토대’개념과 유사하다. 하지만 체계는 경제적 하부구조의 의미만이 아니라 상부구조의 정치와 행정의 영역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토대와는 약간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근대 이전에는 체계는 사회구성원들에 의해 통제 가능했으며 따라서 사회는 평온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하나의 체계로서, 사회체계를 살펴보면, 사회체계는 사회구성원(내적자연)과 자연자원(외적자연)으로 이루어지는데 사회구성원은 말 그대로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자연 자원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적 자원을 말한다.
여기서 사회적 환경과의 교류에서 사회구성원들이 사회화되는 것을 내적자연의 사회화라고 하고 (ex. 가정, 학교, 법, 문화) 사회체계가 필요로 하는 물적 자원이 외적자연으로부터 공급되는 것을 외적자연의 사회화라 한다. (ex. 의복, 음식, 집, 화폐) 그런데, 여기서 외적자연의 사회화는 "조직원리"에 따라 운영된다. 조직원리란 조직은 운영하는 방식, 사회를 운영하는 방식 (ex. 법 ; 신호등이 파란 불일 때 길을 건널 수 있다)이다. 이러한 조직원리는 한 사회가 그 사회의 동질성을 잃지 않으면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를 제한한다. 즉, 내적 자연과 외적 자연의 사회화의 범위, 곧 한계치를 설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사회체계는 조직원리를 변화시킨다. 한 사회체계의 조직원리가 변화하여 그 체계의 동질성을 잃어버리고 다른 조직 원리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과정을 ‘사회진화’라고 한다. 이러한 사회 진화를 통해 체계는 생활세계로부터 독립되고, 분리된다. 즉, 근대 이전 사회 구성원에 의해 통제 가능했던 체계가 사회진화에 의해 통제 불가능한 체계로 독립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 주원인은 생산력의 발달에 있다. 생산력이 극도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외적자연의 사회화과정'즉, 체계의 자율성 획득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이전의 사회통합을 이루어 왔던 생활세계의 규범은 파괴되고 동시에 체계는 생활세계를 침식하면서 넓은 행동공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과정은 사회통합의 위기를 일으키고, 그로 인해 문제해결능력이 떨어뜨린다. 즉, 체계가 분화되고 그 지배영역이 확장되면서, 체계는 더욱 복잡해지고 그로 인해 환경은 통제 불가능한 요소들이 더욱 많아져 사회에 위기를 낳는다. 환경에 있어서 통제 불가능한 요소가 더욱 많아진다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더 이상 체계에 타당성을 청구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인다는 것을 뜻하며 이는 생활세계를 축소화 시키고, 왜소화시킨다. 이를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라 한다.
이러한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현상은 특히 자본주의에서 가장 극대화된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조절하는 시장메커니즘이 생산력발달을 보장함으로써, 사회구성원들이 경제를 통제 불가능하게 하고 그로 인해 사회 통합의 위기를 발생시킨다. 하버마스는 체계의 확장은 사회 구성원의 합의가 아닌 강압에 의해 일어나는 사회 병리적 현상이며, 이로 인해 생활세계의 변형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의 확장 과정이 언어가 아닌 탈언어화된 매체인 '돈과 권력'에 의해 진행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문제점의 대안으로서, 하버마스는 규범 창출적 언어에서의 의사소통행위로 인해 타당성 청구에 의한 합의가 생활세계의 부활을 이끈다고 제안하고 있으며, 이는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정당화 시켜주는 것이다. 즉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은 체계의 자율성에 대항한 생활세계 속 인간 주체의 능동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적극적 역할을 통한 사회변화의 가능성을 낙관한다는 점에서 생활세계의 부활을 추동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의사소통적 이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인가? 하버마스는 여기서 ‘이상적 담화상황’이라는 개념을 정초한다.
V. 이상적 담화상황
이제 여기서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이란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 하버마스는 이상적 담화상황을 제시한다. 언어와 모든 담화에 선험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규칙체계는 담화가 이루어지는 실제적 문법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된다. 이 문법의 가장 간단한 도식은 “나는 - 무언가에 대해 - 상대방에게 - 말한다” 의 형태로 나타낼 수 있다. 이로부터 주체, 객체, 상호주관성, 담화행위 자체라는 네 가지 요소가 도출된다. 말하는 나는 주체이며, 말하는 내용은 객체, 대화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호주관성, 그리고 말하는 행위 그 자체는 담화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 네 요소로부터 담화가 타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4가지의 요구가 있다. 진실성, 진리성, 이해가능성, 규범적 정당성이 그것이다. 진실성은 말하는 내가 상대방을 기만하려 하지 않고 진실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고, 진리성은 말하는 내용이 객관적으로 옳아야 한다는 것, 이해가능성은 상대방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규범적 정당성은 담화 행위가 사회적 권리와 규범에 비추어 정당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4가지 요구가 전제될 때, 이상적인 담화상황이 가능하며 의사소통이 왜곡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위와 같은 이상적 담화상황이 전제될 때, 과연 체계의 확장을 제한하거나 제어할 수 있을까? 이론의 현실적인 적합성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하버마스가 체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체계가 자율적으로 획득한 메커니즘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 엉뚱하게 체계 바깥에서 해결하려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하버마스 입장에서 보면 여전히 도구적 이성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임상의학에 비유해보면 일반적으로 질병을 치유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병의 원인이 되는 것을 제거하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병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는 방법이 있다. 하버마스는 후자의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사회구조의 병리적 현상은 후자의 방법이 좀 더 안전한 편이다. 원인을 제거하는 것은 점진적 개혁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며 필연적으로 체계를 급진적으로 전복시킬 필요성을 낳는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값비싼 비용을 치러야 한다. 또한 원인제거를 통한 체계의 전복이 곧 생활세계의 부활로 이어진다고 말할 수도 없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문제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계급 지배로 보았다. 이것을 청산하려면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끝장내야 했고, 자본주의의 모순은 폭력혁명을 통해 계급구조를 해체함으로써 해결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정작 혁명은 사실상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끝낼 필요가 없었던, 자본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도 않았던 러시아에서 먼저 일어났다. 러시아는 19세기까지 농노제를 유지하였으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러 뒤늦게 산업화과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볼셰비키 혁명은 짜르 체제를 폐지한 1917년 2월 혁명 뒤 겨우 8개월 만에 다시 일어났다. 또한 중국의 공산화는 모택동의 공산당이 1949년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당시 중국에서 자본가와 도시 노동자의 갈등이 첨예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었다. 그 때까지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였던 중국에 자본주의 메커니즘의 문제점이 드러난다는 것은 사실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그런데,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스탈린주의로 퇴행하였고, 1949년의 중국 혁명은 문화대혁명으로 퇴행하였다. 체계를 전복시키면서 다른 체계 메커니즘이 생성되면서 생활세계의 부활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의 예언과 달리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그런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이 지니는 함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체계 메커니즘을 제대로 분석하는 것과 처방을 내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체계 메커니즘은 자율적 속성과 그 나름의 관성을 갖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예언한 것과 달리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은 민주적인 정치제도 내에서 의사소통 합리성을 증대시켰고, 그 결과 유럽 각국은 정부의 개입 (복지와 재정정책 등)으로 시장의 불완전성을 보완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하버마스가 이야기하는 의사소통적 이성은 적실성을 갖게 되는데, 유럽은 하버마스가 정초한 이상적 담화상황에 가장 근접한 공론장의 토대를 갖추었음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VI. 하버마스 철학의 의의
하버마스가 인식론적 객관주의를 비판한 대목은 오늘날 수학과 통계학을 이론적 도구로 삼는 현실 경제학에 대한 비판에 적실성을 갖는 데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현대 경제학의 가장 큰 성과로 평가받는 계량경제학이나 존 내쉬의 게임이론 내에서 인간은 하나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계량경제학에서 인간 개개인의 행위는 전혀 의미가 없으며 모든 것은 총량과 평균으로 분석되고 거기서 도출한 함수식에 따라 미래의 행동은 수학적으로 결정된다. 게임이론의 경우 상대와 나의 선택에 따른 각각의 순서쌍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의 매트릭스는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합리적인 선택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다. 특히, 경제학이나 정치학, 국제관계론에서 자주 인용되는 수인의 딜레마 게임 (Prisoner's Dilemma)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이 얼마나 요구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모델이다.
게다가 하버마스가 강조한 그러한 인식관심은 심지어 오늘날 자연과학에서조차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원자 속의 작은 입자는 객관적인 관찰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미세한 물리세계에서 뉴턴의 고전물리학의 패러다임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으며 그 안의 작은 소립자들은 관찰자의 관찰하는 행위 자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에서조차 물질에 대한 객관적 관찰 자체가 부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늘 실제의 현실이 아닌 몇 가지의 가정에서 출발해 모델을 만드는 현실 경제학이 인식론적 객관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결국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 가치중립적인 객관을 내세우면서 방법론적 과학의 옷을 입은 현실 경제학이 계층 간 빈부격차 문제는 전혀 해결해주고 있지 못한 상황은 과연 우연일까? 하버마스의 논의로 돌아가서 진단하면 경제학자들의 관심이 총량의 부를 증진시키는 데 있을 뿐, 사회구성원 전체의 균등한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실천적 관심’이 없기 때문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하버마스가 내놓는 의사소통적 이성은 오늘날의 사회 현실에서 아주 적합한 처방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먼저 첨예화된 갈등을 에너지 삼아 폭력혁명으로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했던 마르크스주의의 실패를 제대로 반성하는 의미를 띤다. 하버마스는 계급 간 대립이 아니라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상적 담화상황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간의 의사소통은 상대방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예컨대 자본주의가 내재적으로 갖는 체계 자율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이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본가까지 포함하는 인류전체에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공동의 인식이 가능해질 때, 그리고 그것에 대처하기 위한 대안을 합리적으로 논의할 때 체계의 확장속도를 제어하면서 그러한 모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 이상적 담화상황에 대한 강조는 좌우와 보혁 간의 소통이 전혀 안 되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더욱 적실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하버마스는 오늘날 많은 철학자들이 현실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대안을 찾지 못하고 비관주의로 빠져드는 것과 달리 보편적 이성을 의사소통적 이성의 개념으로 정초하면서 인간 주체의 능동적인 의지와 적극적 실천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을 주었다는 것, 인간에게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계몽에 대한 비판이 많은 사람들을 허무와 냉소로 인도하여 결과적으로 사회 변화를 전혀 담보하지 못하는 보수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비판에 직면하는 것과 비교할 때 더욱 그렇다. 하버마스는 근대 계몽의 기획의 시행착오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그 목표를 오늘날 새롭게 설정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의를 지닐 것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recuperate?Redirect=Log&logNo=70019409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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